생명의 원리인 ‘숨(prana)’이 물질에 깃들면, 그것은 작은 우주가 된다. 혼돈 상태에서 시작된 호흡은 바람의 의식을 모사(模寫)하면서 운율을 얻고, 마음은 ‘절대자의 환희’를 재현하고자 염원함으로써 진정성을 얻으며, 이성은 유한자의 절망감과 무한자에 대한 경외심 사이에서 갈팡질팡 괴로워한다. 비록 이 인간적인 것들을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숨만은 분명히 축복이다. 탯줄을 통해 김 여사와 숨을 나눴던 둥근 시간, ‘업(karma)’의 속박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웠던 10개월. 그로부터 오늘.
아니, 몽땅 취소한다. 숨의 이면은 우리가 물질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이 초월할 수 없는 고통 ― 세남매의 무서운 성장 앞에서 나의 아버지는 담배를 피웠다. 제도 교육과의 끝없는 투쟁 한복판에서 형은 담배를 폼 나게 피우며 집을 나갔다. 친구들은 만 오천 원짜리 여인숙 방에서 애인과 섹스를 하고 담배를 구역질 날 때까지 피웠다. 나와 사귄 애인들은 멍청한 내가 짜증 나서 담배를 급히 배웠다. 그리고 나는 ‘담배키스’가 유행이라서 별수 없이 배웠다.
오늘의 나는 담배를 왜 물고 있는 걸까(담배키스 이야기를 정말 믿는 건 아니겠지). 인류의 통속적인 고통에 대해서 담배는 어떤 종류의 응답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들숨을 적극적으로 오염시켜, 가뜩이나 부실한 소우주에 죽음의 거처를 성급하게 마련하고 있다. 물론 스스로를 멈추지 못하는 삶이 죽음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뚱하게 등 돌린 개념처럼 여겨지지만 ‘유한에 대한 절망과 무한에 대한 경외’라는 유사한 연원(淵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흡연은 ‘유한과 무한의 화해’(삶과 죽음, 긍정과 부정의 무한한 교차) 혹은 ‘절대자의 환희’를 추억하는 일일까. 무력하게 흘러가는 삶에 대한 저항을 통해야만 획득이 가능한 숭고한 정신이라도 있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담배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 심한 천식을 앓고 있던 ‘체 게바라(Che Guevara)’에겐 시가가 혁명의 동지였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기로 했다. 피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안 피우기로 한 이유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쿠바의 담배왕이라 하더라도 흡연의 필연성을 납득시킬 수 없다.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들의 중대한 실수는, 금연을 담배의 유해성과의 단절(흡연은 혈중 니코틴·타르 농도의 유지와 같은 불쾌한 타성이 욕망과 각운을 맞추고 있다)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로부터 이어지는 미래’라는 그릇된 인과관계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전에 ‘과거로부터 현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내 흡연의 이유와 상태를 먼저 직시해야 한다. 즉, 담배와 손 꼭 잡고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 고행에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그 어떤 필연도 없이 열세 살부터 16년 동안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정말 멍청하다. 그리고 나의 반성 없음이 매우 불쾌하다.
우리는 흡연의 중단에 대해 그다지 겁먹을 필요가 없다. 흡연의 중단은 (금연과 달리) ‘필 수 없음’이 아니라 ‘피우지 않음’이다. 이것은 의지에 따라 언제든 재흡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러한 상황을 확실히 이해함으로써 담배로 인한 불안과 초조는 우리와 무관하다. 내 옆에는 달콤한 ‘팔리아멘트(Parliament)’가 한 갑하고도 절반, 그리고 지포 라이터가 있다. 내가 다시 원한다면 당장 손을 내밀어 담배를 입에 물고 각성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이다. 내가 ‘분실한 행복’의 ‘행방’은 흡연으로 불행을 치워내거나 현세를 굴절시킨 환각(hallucination)의 길 안을 헤맴으로써 찾아내는 게 아니라, 소우주의 소우주다운 의지로 도약하여 세계를 관망하고 스스로를 행복의 본체로 변화시킴으로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