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네. 여자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54번지 126호의 하루를 읽네. 바람의 언 부리가 여자의 볼을 쪼아 상처 내고 달아났지만 애초에 어리석은 건지 둔감한 건지 반응도 없고. 기암(奇巖)처럼 ‘그냥’ 경이로운 모습이었네. 이런 여자와 마주한 나, 철재 대문은 자신의 유일한 긍지였던 견고함을 스스로 철회하고 싶었다네. 스스로 할 수만 있다면. 붉은 녹을 순환시켜 심장의 온기를 얻고 싶었다네. 물론, 할 수 있었다면 이미 여자를 끌어안고 있을 테지.
‘문 반대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네. 방 안에 숨어서 늘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남자. 사신(死神)이라도 와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던 남자. 결국엔 스스로 사신이 되어갈 남자. 이런 사실을 나, 철재 대문도 ‘그냥’ 알 수 있다는 게 이상하고 불편했지만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어. 그는 늘 나를 강제로 밀고 들어오거나 당겨 나갔거든. 정말 끔찍해. 그때마다 남자는 금세 황홀난측(恍惚難測)한 표정을 지었어. 만족스런 파정(破精)을 한 뒤에 활동적인 생식 세포들을 뿌듯하게 지켜보는 표정이랄까. 징그러워. 하지만 수정(受精) 없이는 세상도 없지. 남자도 여자도 가능성의 세포들을 미래로 이끄는 안내자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나, 철재 대문이 열렸어.
남자는 예정대로 한가한 산보에 나서는 길이었다지. 거드름스레 열린 나 철재 대문 앞에서 여자는 감정의 갈피를 쉬 잡지 못했지. 그럼에도 여자는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상태로 남자마저 ‘그냥’ 맑게 비추었어. 남자의 밀도 높은 어둠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겠지. 생의 활력은커녕 불순물조차 남아있지 않은 사신, 그를 담은 거야. 여자는 뒤늦게 휘청하며 남자 쪽으로 쓰러질뻔했어. 혹시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안아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쩌면 ‘마주 봄’ 직후 이미 하나의 정신이 되어버렸을지도. 나 왈, 모든 시선은 미래에 닿아있나니. 여자는 그대로 집에 들어갔고, 곧장 씻고 깊은 잠에 들었어. 사랑도 혁명도 끝난 시대에 자신이 뭘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아침 여덟 시 오 분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남자는 또 망상을 하지. 아, 저 광택 나는 밤하늘… 같은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 어쩌고저쩌고. 무궁한 우주가 담긴 눈동자… 안엔 초록별이 잔뜩 떠있구나 어쩌고저쩌고. 60억 생명체의 집합이 하나, 둘, 셋… 일흔둘, 일흔셋…, 그 무한개의 별이 우리의 간격에 펼쳐져 우주로 만들어주네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피해 들어간 뒤에 남은 허공은 철재 대문보다 더 견고했지. 현실은 안과 밖이 없으니까. 남자는 침울해져 속으로 깊은 속으로 소원을 빌었어. 내가 문 열어주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해주세요. 수많은 기대의 좌절로 인해, 실패에 덧대어둔 달콤한 상상 탓에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해주세요. 우리 우주에서 운명이 아닌 우연은 우연 아닌 운명만큼이나 불가능하다고.
한 줄 요약. 이웃집 여자와 대문 앞에서 마주쳤다.
한 줄 주의사항. 일기 아니고 글쓰기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