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시간은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시계 분침조차 보이지 않는 작고 캄캄한 방에 누워 잎이 무성하게 돋아나는 꿈을 꾸다가 설핏 깼다. 세상은 아직도 캄캄하다. 나는 책장에서 낡은 책을 고르듯 퍼석한 손바닥으로 턱수염을 쓸어 몸 안의 시간을 가늠한다. 수염이 눕는다. ○○보다 더 빨리 눕는다. ○○보다 더 빨리 울고, ○○보다 먼저 일어난다. 내가 일상생활을 등지고 얻은 가장 쓸 만한 지혜는 몸의 작은 변화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삼거리 담뱃가게에 다녀온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그러니까… 아직 당연히 겨울이구나. 문득 소름이 돋는다, 냉해를 걱정하는 푸른 잎처럼. 차츰 계절도 잊고, 사람도 잊고,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조망하는 방법도 잊었다. 게다가 방 안에선 2004년 8월 어느 날 서툴게 죽어버린 여자의 젖은 목소리가 시간을 교란하고 있다. 어느 가을날 새벽 전파를 떠돌던 『정은임의 FM 영화음악』과 ‘루이스 바칼로프(Luis Bacalov)’가 작곡한 서부 총잡이들의 음악 <The Grand Duel>.
벽지 무늬는 연초록 연밥이 되어 시간의 터널을 연다. 떨어진 연꽃잎은 어느 터널을 통해 사월 초파일로 바삐 가버렸다. 가수 유니도 불현듯 앞서갔지만, 서지원이나 김성재가 떠났을 때만큼의 충격은 없다. 아까부터 먼 시공(時空)의 정은임이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이렇게 늘 속삭여 줄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나는 수염을 깨끗이 깎고 좀 더 자주 집을 나섰겠지. 사서함 0081번으로 엽서를 보내듯 매일 장미향 편지를 쓰겠지. 계절은 모든 계절대로 마냥 아름답겠지. 죽음으로 몸 안에 시간을 쌓는 세포들도 절박한 아쉬움을 유산으로 남기기보다 나의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었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세상은 내게 얼마나 호의적이었나. 조약돌만 한 근심도 충분히 거대하게 부풀릴 줄 아는 마법적인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은 분명 행복하다. 이것은 놀랍도록 창의적인―그래서 지독하게 신성한― 해악(害惡)으로부터 상처 입은 적이 없다는 증거다. 계절을 잊고, 시간을 잊고, 모든 환상을 대강 재현할 수 있는 나는 시간의 터널에 조용히 빗장을 건다. 세상은 봉우리를 펼치고 햇살은 불온함을 살균하며 번진다. 내게도 잎이, 내게도 연두색 잎이, 내게도 초록 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