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이 비좁고 어수선한 곳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에는 팔아먹을 기둥도 없고 동이 안 쌀벌레도 배를 곯”는 탓에 이상한 이름의 땅으로 무리 지어 흘러가기도 하고, “불과 서너 달 전에 배를 산 사내가 경매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선주(船主)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발표”하기도 한다. “‘밤나무가 있었다.’로 시작하는 오래된 이야기. 어디선가, 깎아놓은 밤알보다도 새하얀 이를 가진 남자에게 들은 것 같은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한 사내가 아내 찾기 모험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야 할 곳도 바로 여기다(한 줄 요약은 제법 재미있을 것 같다).

골방에서 누추한 생과 비할 수 없이 이러쿵저러쿵 현학적인 것들을 오래 품다 보면 갑자기 사기가 꺾이곤 한다. 아무리 작품을 들여다봐도 도통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은 능사가 아니다.

그동안 완성 중턱에서 주저앉은 소설이 십여 개, 희곡도 몇 개, 기타 작품 여럿이 하드디스크 트랙과 섹터 틈새에 잠들어 있다. 그들은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완결을 기다리며 쪽잠을 잔다. 나는 재정이 파탄 난 빚쟁이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읽고 영화만 봤다. 나는 도망 중이다.

누구의 추격 없는 도망 생활에서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는 커다란 위안을 주고 있다. 영화 속 ‘트래비스 헨더(해리 딘 스탠튼)’는 3일 동안이나 좁은 모니터 안 텍사스를 횡단하고 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도. 지난 4년을 잃어버리고 ‘파리, 텍사스’로 향하는 남자와 햇수로 3년째 도망 중인 나. 황무지를 말없이 걷는 트래비스에게 동생 월트 헨더슨(딘 스톡웰)은 묻는다.

“어디로 가는지 말해줄 수 있겠어?”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나보다 트래비스가, 트래비스보다 월터가, 월터보다 나의 부모님이, 부모님보다 동결된 산문이 더 확실하게 알고 있다. 어디에 닿는 건지는 몰라도 모든 갈림길에서 험로에 험로를 거쳐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의 몸짓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걸 다 알면서도 정체될 수 없다. 안정된 생활과 좋은 음식과 평범한 사람들과의 여유로운 관계가 등 뒤에 남겨져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으면서도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나는 혼자 횡단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곳을.

긴 밤 공을 들여 오래된 산문 몇 덩어리를 해빙해 봤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종료 휘슬 없이 평생 뭘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매우 끔찍하다. 그래도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오기를 부린다. 이번 글도 말이 안 되면 우기고, 거짓말을 하기 전에 먼저 믿어버리자. 그냥 될 대로 되라는 각오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에 대한 고려가 없었던 탓인지 바닥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재능 없는 나는 수렁에 빠졌을 때 먼저 위로 올라가야 하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 미쳐버릴 지경이다.

내가 고개를 떨군 사이에도 트래비스는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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