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햇빛이 한 줌 들이치고 있다. 저만큼이 오늘 내가 쬘 볕이다. 창문 밖에 뒹구는 햇빛은 남의 산 남의 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 같다. 어릴 적에는 무턱대고 주우러 나섰을 테지만 이제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눈이 더 부지런하다. 열매 주인이 단속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 한번 보고 나서 담장에 기댄 햇빛을 눈으로 품는다. 아주 샛노래서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려둔 노란 크레파스 그 해가 뜬 것 같다. 아주 예쁜데도 창밖으로 경솔하게 내 몸을 내밀지 않는다. 폐쇄병동에 묶여 있는 사람처럼 괜한 기운을 쓰지 않는다. 그게 예쁜 뭐든 내 거로 만들고 싶은 투기가 더는 없다.

드라마 ⟪인간실격⟫ 속 끝 집 강재는 이부정씨에게 “혹시… 아무 이유가 없어도…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싶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휙 뒤집고 고백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저는 지금 엎드려 있습니다. 벌써 팔꿈치가 아파서 계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처음 정한 대로 “보고 싶습니다….”라고 맺었다.

어저께에 이어, 그저께에 이어, 재단한 책을 스캐너에 넣었다. 양면 스캔 시작 버튼을 클릭하고 종이가 위로 들어갔다가 앞으로 나오는 걸 가만히 구경한다. 태연하게 반복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하다. 하지만 한낱 스캔에도 위기라는 게 있어서, 종이가 걸려 구겨지거나 여러 장을 한꺼번에 머금으면 경고음을 내지르며 멎는다. 그때마다 스캐너를 열고 종이를 꺼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넣는다. 그럼 세상은 다시 순조로워진다.

어제는 책을 열여섯 권이나 자르고 스캔했다. 늦은 밤까지 큰 수고했다며 스스로 치하까지 했는데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구경이 전부였다. 밤이 영원히 이어지는 심해 다큐멘터리를 종일 본 것 같았다. 잠을 며칠째 통 자지 못해서 생애 처음으로 수면유도제 ‘쿨드림’을 한 알 삼켰다. 잠 좀 못 자는 게 별거 아니라고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잠에게 생의 한 부분을 빼앗기고 있다는 악감정은 갖지 말아야 했다. 새벽은 잠으로 탕진하기에 너무 반짝이지만 그래서 더욱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시공간을 초월한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는 동안 입으로 들어간 약이 녹아 머리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종이가 위로 들어갔다가 앞으로 나오는 스캐너와 내 뉜 몸이 흐린 의식 속에서 겹쳐졌다. 그리고 침대가 회전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현기증이 뒤따라 왔는데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얼굴들이 떠올랐다. 몸통 없는 목에는 아마도 내 것인 ‘생각’이 걸려 있었다. 가령 엄마 목에는 ‘안 아팠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이 어떤 관념의 형태로 걸려있었다. 그 밖에도 온갖 것들이 일렁일렁 떠올랐다. 이미 망했다는 걸 예감하면서도 딱히 걸리는 것 없이 잠들기만 바랐다.

다시 밤이다. 참 예뻤던 햇빛은 모두 빠져나갔는데 밤도 예쁘다. 예쁜 것을 등질 때마다 슬프다. 그래도 나의 새 약, ‘레돌민정’을 먹어야지. 레돌민정 상자에는 초승달이 뜬 도시의 밤 풍경이 그려져 있고, 그 곁으로 “수면 리듬 개선으로 숙면을! / 습관성이 없는 생약성분 숙면 솔루션 / 편안한 잠이 필요할 때 / 잠에서 자주 깰 때 / 잠들지 못할 때 / 스위스 수입 의약품 / 레돌민정”이라는 문구가 빼곡히 쓰여있다.


덧붙임. 한 조사에 따르면 SNS에서 긴 글을 읽는 사람은 6퍼센트도 안 된다. 우리는 다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수면 부족으로 인한 기면 일기를 누구도 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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