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상처, 끌어안기

로망스(Romance, 2006)(‘알라딘’에서 정보보기)

문승욱 감독, 조재현(형준)·김지수(윤희)·기주봉(황 반장) 출연



낭만적인 사랑은 어리석음 그 자체다. 베르테르(Werther)는 로테를 실연(失戀) 한 뒤 알베르트에게 호신용 권총을 빌려 목숨을 끊었고, 트리스탄(Tristan)은 큰아버지의 아내가 될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Isolde)와 사랑의 비약(秘藥)을 함께 삼켜 죽음에 이른다. 단테(Dante)는 단명한 베아트리체(Beatrice)를 『신곡(神曲)』의 연옥에서 만나 사랑을 이룬다. 이런 사례는 백수건달만큼이나 세상에 널려있다. 가까운 곳에는 김지수를 연모하느라 잠 못 드는 내가 있다.

긴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하듯 김지수가 젖은 눈망울로 돌아왔다. 성폭력에 의해 여성성과 자아를 잃고 적막한 내부로 걸어 들어갔던 《여자, 정혜》(2005)의 김지수가, 이름을 달리한 채 울음을 참으며 형준(조재현) 앞에 서 있다.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동정한 적 없는 그들의 눈에 비친 그(그녀)는 안타깝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투영된 상처를 보듬어가며 함께 있음으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완성한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근육이 바짝 말라버린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삼투된다. 남편의 그릇된 집착으로 핀 초록 선인장 같은 멍이 형준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밑바닥 형사로서 뒤집을 수 없는 부조리와 틀어져 버린 돈·직장·가족의 절망이 윤희의 닫힌 마음으로 파고들어 눈물샘을 채운다.

하지만 “김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라는 비극적인 명제를 증명하듯, 정치하시는 남편은 윤희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형준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과연 죽으면 잊을까. 잊히면 죽을까. 꼭 해야 할 일이 생긴 형준은 죽음까지 때려눕히고 윤희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형준에게 무력감을 안겨줬던 강 형사(윤제문)와 경찰·특공대의 신속한 출동으로 상황은 심란해진다.

이 작품은 김지수로 인해 부족함이 없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로망스에 다짜고짜 개입하는 권력과 공권력은 모범이 아닌 게 맞지? 확실히 후반의 무리한 액션은 기획의 실패다. 한국적인 ‘애틋’ 멜로라인에 후반 20분간 얄팍하게 버무린 ‘비장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어지간하면 결말 스포일러까지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제작진의 신파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나는 죽음은 참아줄 수 없다. 결국 감독만 눈물에 취하고 흥행에 취해서 그들을 죽였다. 비록 둘이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간통으로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을 교도소 서신 교환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인 것도 모자라서, ‘죽음 = 사랑의 진정한 완성’으로 미화한 탱고 영상은 촌스럽다. 작가나 감독의 생각보다 (나를 제외한) 관객은 감독보다 똑똑하다. 그리고 형준이 아무리 아시안게임 사격 동메달리스트 행사라지만 김지수 씨를 성실하게 유혹해놓고 이러시면(?) 안 되는 거다. 


중론대로 조재현의 멜로 연기는 한 호흡이 빠르다. 가끔씩 《여자, 정혜》의 김지수가 《나쁜 남자》의 조재현을 만났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영상은 조명 감독님이 고생한 티가 역력하다. 어쩌면 빛을 잡아내느라 정작 배우들을 드러내는 데는 소홀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움이 큰 만큼 욕심이 생겨서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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