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파주 출판단지에 다녀왔다. 허울은 전공현장실습 인솔자였지만 나부터 집합 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일정이 끝날 즈음에는 손지민 조교님의 얼굴을 볼 염치가 없었다.

전공현장실습 일정은 오전 열 시쯤 열화당 책 박물관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 도슨트의 도움을 받아 관람하고, 점심으로 김치찜을 뚝딱 마신 뒤, 활판인쇄박물관에서 활판인쇄체험을 하고, 지혜의 숲을 마음껏 거닐다 돌아오는 것이었다. 

인솔자의 부담감에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쯤 먼저 열화당 책 박물관에 도착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안선아와 박해림이 도착했다. 우리는 젤리를 나눠 먹으면서 전세버스를 기다렸다. 

열화당 책 박물관에는 옛날 책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왜란 즈음의 기록들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인의 행색은 매우 야만적이었는데, 그들은 항상 조선인을 칼로 베고 있었다. 그리고 흰 종이 곳곳에 조선인의 절단된 신체가 뒹굴었다. 왕실의 객관적인 기록이라고는 하나, 머리나 팔이 잘린 조선인을 옮긴 그림에는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매끈하게 잘린 나뭇가지를 보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활판인쇄박물관은 경이로웠다. 손톱보다 작은 글자꼴을 하나하나 모아 책 한권을 만드는 활자공의 마음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된 문장에 이름 활자 몇 개를 찾아 넣는 책갈피 만들기 체험을 하면서는 마음이 더욱 어지러웠다. 글자마다 같은 활자가 수북했지만 마냥 같지만은 않았다. 아이들은 이름이나 필명의 활자를 담은 작은 사각 접시를 들고 줄지어 인쇄체험을 했다. 직원분이 인쇄기의 도르래를 살짝 돌리라고 주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아이들은 대체 왜 이럴까?’라고 생각하면서 살살 조작했지만 더 크게 ‘탕’ 소리가 났다. 내가 해봐서 아는 것도 그래서는 안 되지만, 내가 안 해본 것에 관해서는 절대 속단하지 말아야겠다. 아무튼 우리들은, 이 책갈피 석 장이 뭐라고, 즐거웠다. 

지혜의 숲은 컸다. 그 많은 책 중 절반 이상이 팔을 아무리 뻗어도 손에 닿지 않았다. 숲이니까. 나를 비롯한 다수는 지혜의 숲 부근 작은 헌책방에서 자유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책값이 저렴했지만 한 권도 사지 않았다. 책장에서 친분이 있는 작가를 발견하면 괜히 기뻤다.

전세버스에 아이들을 태워 보낸 뒤에 합정행 버스를 탔다. 생애 첫 이층 버스였다. 생애 첫 버스 이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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