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대학 시절의 기억은 자취방으로 시작해서 자취방으로 끝난다. 한 번쯤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당시 기숙사에 기거하는 남학생들은 여자기숙사 내선번호 네 자리를 무작위로 눌러 폰팅을 하곤 했는데, 나도 진짜진짜 밤새 소곤대고 싶었다. 하지만 폰팅 때문에 밤 10시에 귀가해야 하는 신데렐라가 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동네 외곽을 돌며 4년 동안 자취를 했다. 일 년 사글세 80만 원 내외하는 방들은 죄다 구질구질했다. 심지어 공용화장실을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나는 이 열악한 자취방에 4인용 소파를 욱여넣고 그 위에서 책을 읽고 담배를 피우고 때론 낮잠을 잤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학과 일엔 심드렁했고 마주칠 때마다 치킨을 사달라던 선배를 알 게 되면서 동아리 활동도 두 주 만에 그만뒀다. 당연히 따르는 후배도 없었고 아껴주는 교수님도 없었다. 가끔 동기 서너 명과 어울리며 대학 시절을 끝냈다.

그리고 10년 만에 학교를 다시 찾았다.

학교 후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요조의 콘서트를 홍보하는 대형 광고가 보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다는 헐리우드 간판처럼, 요조의 평상복을 백 배쯤 확대해서 제작한 듯한 흰 티셔츠(개복치 무늬 프린트)와 약간 스키니한 청바지, 그리고 옅은 갈색 밀짚모자가 언덕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엔 홍보문구가 균형감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요조의 새 앨범의 타이틀곡인 ‘화분’을 흥얼거리면서 기념관 앞을 지나쳐 학생회관 쪽으로 향했다.

학생회관 앞 공터에는 요조의 자동차가 서 있었다. 매우 흔한 종류의 남색 봉고차였지만, 활짝 열린 문 안에 설치광고와 똑같은 차림을 한 요조가 앉아 있었다. 나는 ‘오와!’ 정도의 탄성을 뱉은 것 같다. 그리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걸으며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학교 안을 느긋하게 둘러봤다.

약속장소에는 모두 도착해 있었다. 선배 N, 선배 P, 동기 S, 동기 K. 그리고 낯익은 여자 한 명. 일행과 어울려 앉아있는 요조를 발견하곤 상당히 놀랐지만 나는 꽤 자연스럽게 지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요조에게 무슨 말이든 토해내려던 순간, 요조는 동기 K의 손을 잡아끌며 수목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우리의 시선은 요조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점으로 환원되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곧 어딘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요조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심통이 났다. 어느새 나는 악악거리며 시소 위를 뛰고 있었다. 시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배 P는 가만히 있으라고 화를 냈다. 내가 정신을 차린 뒤에도 눈에 핏줄이 내돋칠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내가 시소에 앉아 있다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고 선배 P에게 사과했다. 그 와중에도 요조의 노랫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선배들은 심술이 났다. 선배들은 발악하듯이 동기 K의 이름을 불렀다. 요조는 불쾌한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수목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선배들은 괘념치 않고 두꺼비 같은 말만 쏟아냈다. 지금 K가 네 노래나 흥얼거릴 만큼 한가한 줄 아느냐, 네 노래를 들려주고 싶으면 CD를 선물해라, 넌 라이브보다 mp3가 낫더라, 이 많은 사람이 너 때문에 멍청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냐, 등등. 요조는 단단히 화가 났다. 우리에게도 자기 노래를 불러달라는 투정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지만 화가 난 건 난 거였다.

요조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동기 K는 그 뒤를 쫓아갔다. 선배들과 나는 똑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내 동기 K를 찾아 나섰다. 아니, 모두 요조를 찾고 싶었다. 되찾고 싶었다.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고 노랫말을 지어주길 바랐다. 간절히.

요조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요조의 봉고차가 서 있던 곳을 향했다. 연못을 한 바퀴 돌고 사회대를 지나쳐서 학생회관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색 봉고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주변이 텅 비어있었다. 조감도 안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 돌풍에 휩싸였다. 일제히 일어났다가 주저앉는 머리카락을 잠깐 감쌌다가 고개를 들었다. 돌풍은 요조의 대형 광고판을 괴롭히고 있었다. 자이언트 요조의 대형 옷과 모자가 위태롭게 팽팽해졌다가 빨랫감처럼 툭 떨어졌다. 나는 광고판 아래로 달려갔다. 짧은 순간에 든 생각이었지만 저 옷을 주워서 제자리에 걸어둔다면 내게도 원 없이 노래를 불러줄 것 같았다. ‘춤’의 가사처럼 “태양처럼 사실인 그대”가 나른한 노래를 밤새 들려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모두 다 꿈.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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