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생즉사 사필즉생(必生卽死 死必卽生)
방과 후 옥상(See You After School, 2006)(‘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이석훈 감독, 봉태규(남궁달)·김태현(마연성)·정구연(최미나)·하석진(강제구) 출연

영화 《싸움의 기술》(김한솔 감독)에 이어 다시 학교 이야기다. 또래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만화방 <천일문고>에서 ‘용소자’와 ‘용호야’의 의협심에 감동받아 소림사 입문을 꿈꾸던 시기는 제외하고,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지금껏 어깨 꽤나 부딪치며 살아왔는데 짧은 에피소드 하나로 학창 시절을 추억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제 겨우 흥이 오르기 시작하는데 집에 가려는 건 아니지?
때는 바야흐로 ****년, 충청남도 H군 H읍 H초등학교 조회 시간마다 교직원 테니스장의 돌을 고르고 땅을 밟아 다지는 노역이 끝나가던 초가을이던가? 서울 살던 K가 전학을 왔다. K의 외형은 찰흙 공작을 위해 나무젓가락과 철사로 세워놓은 뼈대처럼 앙상했다. 그리고 콩고물을 버무려 놓은 듯 희누런 얼굴에 윤곽 뚜렷한 눈코입이 얹어져 있었다. 당시 아이들의 감상을 종합해 보면, ‘괴롭혀라’라는 속삭임이 의식 너머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서울’이라는 다른 세계에 대한 시골 아이들의 적개심이었을까.
그즈음 나는 소년 가장이 주인공인 청소년 소설 『혼자 도는 바람개비』와 와 미카엘 엔데의 청소년 소설 『마법의 술』을 좋아했고, 이를 눈여겨 본 선생님의 추천으로 백일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온통 몽상에 빠져 지내는 동안, 서울에서 야생으로 전학 온 K는 한 마리의 영양(羚羊)처럼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교정을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다. 그래도 나는 K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반이었고, 내가 어울리는 친구들은 만화책과 게임기와 컴퓨터에만 흥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폭력이라는 것은 어느 편에 서더라도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화 《방과 후 옥상》 속 남궁달(봉태규)도 전학 첫날부터 바쁘다. 그는 전학 이전에 ‘왕따 탈출 클리닉’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는데, 새 학교에서 완벽히 적응해 버린 클리닉 동기 ‘얌생’ 마연성(김태현)과 재회한다. 그는 남궁달에게 자신만의 왕따 탈출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 방법이란, 허수(虛數)로 보이는 놈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자신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전시하고 삥-시장진입장벽(삥-市場進入障壁)이 높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성공의 증거인 마연성을 마주한 남궁달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호구(虎口)가 아닌 학교 짱 강제구(하석진)를 감히 건드리게 된다. 그 결과, 학교 짱의 선전포고에 따라 ‘방과 후 옥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남은 시간은 420분, 즉 일곱 시간뿐이다.
남궁달은 일곱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역사 속에서 해답을 구해보자. 1597년(선조 30)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전함 12척과 군사 1백20여 명을 이끌고 왜군 전함 133척과 군사 3만여 명을 무찌르기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호기롭게 말씀하셨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서울에서 H읍으로 전학 온 K도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살기보다 죽고자 결심했다. 앙상한 팔과 다리를 무기로 아이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런데 K는 생각보다 날쌔고 강했다. 무엇보다도 잔혹했다. 무자비함을 증명할수록 친구들이 늘었다. 중학생이 되자 그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고 키도 더 자랐다. 어느새 무감각한 폭력성으로 지역에서 이름을 알렸다. 여자 친구를 집에서 가둔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풍문을 확인할 새도 없이, 어느 날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남궁달은 학교 짱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까. 영화 《방과 후 옥상》은 다수에게 다만 오락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사건은 누군가의 미래를 틀어버린다. 소년 K의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다.
덧. 얌생 마연성으로 출연하는 김태현 배우의 발견에 가깝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청춘물에서 이토록 상큼한 맛을 살려낼 배우는 없다. 비슷한 캐릭터로 출연이 잦은 강성진 배우가 맡았다면 영화는 좌초됐을 것이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냉정한 사업가 ‘천호진’의 가정부로 출연했다던데, 박수를 보낼만한 캐스팅이다. 봉태규 배우는 여지없는 남궁달 자체. 남궁달을 위기에 빠뜨리고 마지막 결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장 최미나 역을 맡은 정구연 배우는 너무 흐릿하게 그려진다. 학교 짱 하석진 배우는 남궁달이 트라우마(trauma)를 지양하고 약자와의 동류의식(同類意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반복(叛服)1과 그 역(逆)을 끌어내 줘야 하는데 상당히 힘에 부치는 것 같아 아쉬웠다.
- 반역과 복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