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책을 무더기로 구경해야겠다는 형의 고집에 못 이겨 아침 여덟 시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평소 나라면 한창 잘 시간인데도 조카들은 군말 없이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책은 당장 손에 쥐고 읽을 단 한 권만 있으면 될 텐데 거기까지 왜,라고 강변해도 소용없었다.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몇 분 서 있는 것만으로도 혼이 빠졌다. 대략 4500평 규모의 전시장을 가득 채운 책, 다른 곳에서 구경하기 힘든 해외 도서. 다채로운 부스 사이를 흐르면서 여유롭게 글자를 곱씹는 사람들과 긍지 가득한 표정으로 매대 위 책에 관해 설명을 곁들이는 사람들…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나 혼자 순진한 기대를 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비슷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서울국제도서전은 대대형 서점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전신은 1954년 서울도서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뭘 계승하고 뭘 발전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소위 ‘국제도서’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살았다는 “예쁜 붕어 두 마리” 정도고, 어린이 학습지 장사꾼이 목 좋은 곳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장사꾼들은 수완만큼이나 인심도 후해서 온갖 기념품을 무료로 나눠줬다. 공짜는 안 받으면 손해니까(정말 대단한 마케팅 구호다), 기념품을 얻으려는 아이와 부모님(대부분 어머니)으로 전시장 중심 통로가 꽉 막혔다. 다 같이 한 칸씩 세 들어 전시하는 처지에 ‘(주)기탄교육’ 직원들은 앰프까지 연결한 마이크로 쉼 없이 떠들었다. 정확한 통계가 있을 리 없겠지만 입장객 중 최소 8할은 조기교육 교재를 고르기 위해서 구슬땀을 흘렸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책 도떼기시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중 반가운 부스들도 몇몇 보였다. 민음사, 책세상,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범우사, 살림출판사, 세계문학, 휴머니스트, 김영사, 열린책들. ― 우리 앞으로도 잘해 봅시다. 열린책들은 얄팍한 장정(裝幀)으로 가격 장난 그만 치길 부탁드립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자명한 낮, 그리고 밤

낮 눈 뜨자마자 ‘애인을 집으로 초대한 사람처럼 부지런히 움직이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애인이 없으니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구나. 비현실적이며 실현…

사랑을 쓰려거든 스마트보드

스마트보드를 샀다. 경솔하게 써도 담아두지 않는대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여기에 부끄러운 게 아직 부끄러울 때 고백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팟!

도저히 내 힘으로 면할 수 없는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이 피로는 ‘절전모드’로 잠에 들면서 시작됐다. 불과 몇 개월…

지옥이란 이런 곳인가?

오늘도 특별한 날이 아니다. 어제나 엊그제와 같이 지겹다. 지난주에는 강의실 단상 앞에서 “지옥이란 이런 곳인가?”라고 혼자 물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