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아직 잘 모른다. 미술사 수업 몇 번,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의 『서양미술사』와 미학사 책 몇 권 읽었다고 경솔하게 떠들 수 있는 만만한 영역이 아니다. 작품을 평가하는 내 유치한 관점은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 정도다. 하지만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실사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은 입시 미술 데생 정도로 촌스러운 영역이 되어버렸다. 사진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추상과 낙서의 경계에서 섰을 때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다.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이 입체파(cubism)에 관하여 대상과 실제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일그러짐을 아무리 설명해도,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고 추앙해도 나는 잘 모르겠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십 대 시절부터 라파엘로(Raffaello Sānzio di Urbino 1483∼1520)처럼 그렸다는 천재의 눈에는 세계의 분열된 파편이 보이는 모양이다(“나는 결코 어린아이다운 데생을 하지 않았다. 난 12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을 엿보고 싶어서 《파블로 피카소 展》에 다녀왔다.
갤러리에는 피카소의 충동이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순간이 그림으로 그려졌고, 어떤 순간은 수많은 스케치로 다시 창조됐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적확한 언어로 기록하는 일과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에 모호한 언어로 차츰 가까이 다가가는 일에 빗댄다면 나 역시 후자에 마음을 더 쓴다. 그런 것일까. 깊이 아는 바가 없어서 임의로이 믿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피카소의 ‘구성(構成 construction)’에 대한 열정은 온전히 전해졌다. 그가 지향했던 바에 얼마나 근접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나는 글을 그렇게 치열하게 쓰지 않는다. 그래서 습작에 머무는 거겠지. 세상은 참 공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