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몸을 둥글게 말아 알로 돌아간다.

고대 인류에게는 매끈한 껍질에 둘러싸여 자기 몸을 껴안는 초월적 시간이 주어졌다. 기약 없이 이어지는 밤의 아무도 두드려주지 않는 시간. 그 속에서 껍질 밖 외계를 향해 고동치며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이해했다. 알이 가끔씩 알 수 없는 이유로 공깃돌처럼 구르면 다른 알 무리와 만나는 상상을 하며 꾸벅꾸벅 졸다 깨어 죽다 살아나는 가짜 기억만 차곡차곡 쌓았다. 그러다가 지금은 결국 사라진 존재.

몸을 둥글게 말아 그 알로 돌아간다. 조금 이르지만 이곳은 옹관(甕棺)과 다름없다.


2004년, 나는 종로 5가에 고시원 방 한 칸을 빌렸다. 그리고 먼 남쪽에서 묻어온 봄을 고향에 떼어놓고 열차에 올랐다. 열차 창밖으로 자꾸 물러나는 건 꽃과 한 시절이었다.

종로5가역은 사시사철 추운 나라의 대피소 같았다. 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무채색 점퍼 안에 맨살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장 눈송이가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고시원 앞 건널목 신호등은 쉽사리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고시원 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너무 추웠다. 방석만 한 전기스토브에 의지해 언 몸을 녹여야 했다. 그렇다고 불평 한마디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고시원 원장은 광고홍보학과 수석 졸업생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딱 하나 남은 ‘창문 있는 방’을 보여주면서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환기가 잘 되는 방입니다. 지금은 창 너머에 겨울바람이 있지만 곧 봄바람으로 바뀌겠지요. 담배 피우시죠? 방 안에서 피워도 됩니다. 하루에 스무 번씩 오르내리다 보면 옥상이 참 멀게 느껴져요.”라고 말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관용 봉투에서 돈뭉치를 꺼내 건넸다.

전기스토브의 붉은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위안이 됐다. 길이 다 희게 지워진 설산을 혼자 걷다가 발견한 인적 같았다. 하지만 정작 추위가 한창인 새벽에는 전기스토브를 꺼야 했다. 이불에, 침대에, 내게, 고시원에, 종로에, 서울에, 세상에, 저 불이 옮겨붙을까 봐 차마 켠 채 잠들지 못했다. 새벽 추위에 눈이 뜨이면 전기스토브를 다시 켜고 둥글게 얼어버린 몸을 녹였다. 피가 다시 도는 기분이 들면 전기스토브를 끄고 잠을 청했다. 그럼에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유일한 방이니까 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낮에 정신이 들면 어딜 가야 할지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기우는 해가 두 뼘짜리 창 안에 볕을 밀어 넣을 때까지 줄곧 누워있다가 고시원 방을 무작정 나섰다. 옷은 늘 청바지, 티셔츠, 더플 코드였다. 여기에 청바지 한 장, 티셔츠 두 장, 양복 한 벌을 더하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는 고시원 주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들 내 외로움을 상대해 줄 여유가 없었다. 얼굴이 얼얼해지고서야 길 건너 편의점에 들어가서 컵라면을 먹었다. 세상이 정한 선보다 훨씬 많은 물을 붓고 국물을 다 마셨다. 뼛속에 스민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전기스토브를 켜고 텔레비전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침대 발밑 선반에 얹어진 14인치 텔레비전으로 떠들썩한 어느 나라를 조용하게 바라봤다. 세상은 14인치에 불과했고 고시원 방은 그보다 작을 게 분명했다. 


어느새 두 해가 흘렀다. 지금도 고시원 방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옹관에는 나뿐인데 아우성이 들린다. 하지만 옹관을 스스로 깨고 나갈 힘은 아직이다. 여태 그만큼이다. 서러워서, 내 정말 서럽고 더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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