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Eros), 眞 맛과 이데아(idea)에의 의지
음란서생(淫亂書生, 2006)(‘알라딘’에서 정보보기)
김대우 감독, 한석규(윤서)·이범수(의금부 광헌)·김민정(정빈)·오달수(황가)·안내상(왕) 출연
에로티시즘(eroticism)의 ‘공알1’은 ‘진맛((眞맛)’이라고 한다. 황가(오달수)의 말을 빌리자면 “꿈꾸는 거 같은 것, 꿈에서 본거 같은 것,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이 진맛이다. 양민(良民) 오달수의 주둥아리에서 쏟아진 말이라서 지 낯짝만큼 품위가 없다. 그래서 ‘조르쥬 바타이유(G. Bataille)’씨의 도움을 받아 고급스럽게 패키징 해보자. ‘진맛’은 “욕망의 대상과 내적 욕망의 일치이다.”(『에로티즘』, 민음사, 1997). 역시 기품과 풍모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의는 얼마나 가혹한가. 누구나 주체와 대상의 (내적) 일치·합일을 욕망하지만, 그 대상과의 거리란 참 멀다(tele). 얼마나? 윤서(한석규)와 정빈(김민정) 사이보다 훠-얼씬 더. 당연히, 대상은 가까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눈앞에 치이는 대상과의 합일로부터 진맛이 올 리 만무하다. 한낱 내 스피커도 50m에 하나씩 세워진 전신주에서 끌어온 전기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순수한 수력·풍력·태양열 발전 에너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발전소 콘센트에서 갓 생산된 전기를 빨아먹어야 기쁨의 비명을 지를 거다. 왜? 쾌락은 평범한 것이 아닌, ‘금기(禁忌)의 위반과 극복을 통해서 무한하게 증폭되는 쾌락의 경제학’(유기환, 『조르주 바타이유』, 살림)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진맛도 이데아(idea)니까. 일찍이 이 모든 사실을 알아낸 플라톤(Platon)은 “에로스는 완전성에 대한 동경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이상 속 완전성 그 자체는 배우 김지수 씨다. 하지만 내가 알며 사랑하는, ‘이미지로 공급되는’ 김지수 씨는 응당 허상(虛像)이다. 이를 장애로 인식하지 않고 정제된 이미지로 받아들이며 소비하는 사람들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 지경에 이르면 텔레비전(television)은 텔레(tele, 원거리)의 의미를 넘어, 대상과 합일을 욕망하는 인간의 위안을 위하여 탄생한 목적론(teleology)적인 물건이 된다. 내게도 김지수씨가 (종일 나오는 텔레비전이) 필요하다.
영화 속 샌님 윤서(한석규)의 꿈은 정빈(김민정)을 향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적인 금기의 비호를 받고 있다. 결국, 그 금기를 위반한 윤서는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말한다.
“사랑한다 말하면 목숨을 부지한다는데, 또 어찌 사랑한다 하오리까.”
이 한 줄에는 욕망과 금기, 그리고 사랑과 쾌락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그저 저승에서 다시 뵐 뿐이옵니다.”라고 덧붙임으로써 이계(外界)에서의 합일을 기약한다.
이러한 진맛은 현실에서 절대 이룰 수 없다. 이계에서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취하는 대상의 이미지는 가공이 이루어진 것이며, 외부에서 공급되는 에로티시즘은 실상(實像)의 부분이거나 거짓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허상과의 합일, 부존재와의 합일, 전체의 내적 일치에 이르는 길은 환상일 뿐이다. 솔직히 지구별에 완전한 게 어디 있니. 또한 정형화된 성적 상상력의 대부분은 제도 속에서 관용(寬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금기로부터 수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한계를 상상력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아니, 상상력은 극복되어야 한다. 야설(冶說)에서 나타나는 저급한 무한 배설과 기계적 생식을 뒤로하고, 정욕적인 세속의 에로스를 지양해야 한다. 즉, 동물적인 상상력의 극복이 필요하다. 모든 행위가 “동물적이지 않을 때”, 에로틱은 살아난다. 그다음에야 촌스러운 현실 속의 사랑에서 “욕망의 대상과 내적 욕망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욕망 기관이 없는 ‘가이아(Gaia)’2가 아니다. “형상도 질서도 없는 하나의 덩어리”(이윤기,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에 불과한 ‘카오스(Chaos)’ 속에 자리 잡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인 ‘우라노스(Ouranos)’와 바다인 ‘폰토스(Pontos)’, 산맥인 ‘우레아(Ourea)’를 낳을 수는 없다. 이는 ‘에로스(Eros)―태초에 카오스로부터 곧장 태어난―’ 탄생 전의 일이다.
이후 에로스는 수많은 애욕의 신화를 만들어 나간다. “위반이라는 관념은 어느 날 초기의 변증법적 사유에서 모순의 경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문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관념이 될 것이며, 적어도 사실상 우리 문화의 토양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지만, ‘동물적인 상상력’은 신화의 시대에서 진작 끝장났다. 그걸 밀어내고 ‘식물적인 상상력’이 들어섰다.
21세기의 음란서생들이 시청 앞에서 거리 응원을 핑계로 사람들을 만지거나 몰래 사진 촬영을 한다는 말이 나온다. 저 치한들은 누구의 새끼들인가. 어느 어머니도 63일 만에 그들을 출산하지는 않았을 텐데. 누가 나 만질까봐 거리 응원 못 가고 있다.
영화 《음란서생(淫亂書生)》은 엄숙함의 제약 속에서 피어나는 음란한 농담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금기’나 ‘욕망’에 대해서 머리 짜는 사람은 멍청하다. 봐라, 머릿속이 하얀 재가 되어버리는 이 감상문을. 알몸으로 웅크린 채 풀어내다가 너무 천박해서 깨끗이 지워버린 「천 개의 골짜기, 야설의 구조」나 완성시킬 걸 잘못했다(거짓말).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는 배우 안내상이 좋다. 누군가가 “친분을 나누고 싶은 배우 두 명을 골라라”라고 물으면, ㉠ 김지수 ㉡ 안내상을 선택하겠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는데 셋이 함께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