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OST. 윤종신, 고백을 앞두고


지구가 빗물에 식고 있다.

‘난 비가 참 좋다. 습하다는 건 잊고 지낸 몸을 상기시키지. 커피도 훨씬 맛있고. (…)’

이런 식으로 여러 해 자기최면을 걸어 봤지만 별다른 효능이 없다. 어쩌면 기호(嗜好) 역시 운명의 산물이라서 후천적으로 뒤집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함평 모씨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느 머나먼 친척은 평소 즐겨 먹는 자두맛 사탕이 동네 구멍가게에 품절이자 다른 지역까지 원정 쇼핑을 나갔다가 갑작스럽게 쏟아진 장맛비에 고립된 채 저혈당 쇼크를 맞아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거짓말).

하여간 나는 격정적으로 비를 싫어한다. 오랜만에 평택에서 올라온 친구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전화를 걸어왔지만 바지 밑단이 젖은 채 돌아다니는 게 너무 끔찍해서 거절해 버렸다. 호우주의보를 무시하고 외출을 했다면 한 달 만에 음식다운 것으로 배를 채웠겠으나 그보다 습한 방안에서의 텔레비전 시청을 선택했다. 그리고 책 1/5을 마저 읽고 개운하게 덮어버렸다. 그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글쓰기가 참 쉬워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책을 덮어버리는 순간, 해결된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갖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장·단의 아이러니끼리 다투면서 흘러간다.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보다 훨씬 복잡하게.


오늘 시청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389회) – 나는 결혼하고 싶다》 편이다. 안정된 직장, 전시할 만한 학력, 나보다 훨씬 나은 외모를 갖춘 30~40대의 많은 미혼 성인이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생스럽게 마련한 집을 미래의 아내와 함께 꾸미기 위해서 가구 하나 없이 생활 중인 남자도 있었다. 작은방에는 가계부 적는 아내를 위한 고급 책상과 육아와 관련된 비디오테이프·책들이 갖춰져 있더라.

이 무결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째서 결혼을 못 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유학을 다녀오고,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난 뒤 주변을 둘러보니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생활공동체에서 이루어지던 중매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결혼정보회사의 입장에서 그들은 특별한 경쟁력이 없는 평범한 노총각·노처녀일 뿐이다.

나 또한 새로운 사람과 부대낄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전 직장의 미혼 여성은 모두 30대 중반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철딱서니인 탓인지 연상과는 마음이 닿지 않는다. 오래전 잘 안다고 믿었던 ‘호감 탐색 방법’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이젠 임수정과 단둘이 무인도에 던져놔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면서 숲속으로 뛰어갈 것 같다.

그보다도,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다가 정말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있었는데 텔레비전 안의 한 남자도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그도 나를 시청하고 있는 것처럼. 뒤이어 ‘어쩌면 그렇게 슬픈 모습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도 정면을 응시하면서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나는 어떻게 비칠까. 그래서 내일은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제발, 텔레비전 속 남자보다 당당했으면 좋겠다. 차인표가 이 닦는 모습처럼 결연하게. 물론 한없이 불쌍해 보여도 별수 없다. 나는 땅 가진 농촌의 노총각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런 반면 필살의 위기의식으로 열렬한 구애를 벌여 고운 색시를 얻은 ㅅ군에게 심심한 축하 메시지를 띄운다(인증샷 바로가기). 그만하면 비싼 등록금은 제대로 뽑았다. 대한의 청년들은 이 교훈을 가슴에 피로 새겨야 한다. 대학이나 대학원은 학업이 전부가 아니다. 너무 건성건성 건전한 이성 교제만 하다가는 홀아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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