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런거림의 성스러움
김종광, 『낙서문학사』, 문학과지성사, 2006.(‘알라딘’에서 정보보기)
김종광은 또 한 번의 자기갱신을 유쾌하게 이뤘다. 이미 전작 『모내기 블루스』(창작과비평사)에서 한바탕 너스레를 떨며 찰진 이바구1를 풀어냈던 그에게 품었던 기대가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그의 전작은 꾸밈없는 일상의 언어로 풍요로운 흙의 정서를 뽐내는 데는 성공을 거뒀지만, 문제의 소급이 사적영역에 그쳤다는데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김종광이 이 맛깔스러움을 간직하는 동시에 공적영역으로 작품을 확장시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문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낙서문학사』의 단편들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전개되어 ‘낭만적 반동’을 도출할 뿐만 아니라 ‘반동적 낭만’의 감정으로까지 분열한다. 이미 문단에서 귀한 포지션을 점한(아마도) 김종광이 “용기백배하여”(p.352) 기획한 ‘문학과 작가와 독자와 출판사와 시장의 해체’(「낙서문학사 창시자편」·「낙서문학사 발흥자편」)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반동적이다. 이 괘씸하고 위험한 투쟁에는 이미 몇 번인가 쓰였던 ‘수런거림’이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인물들이 은밀한 회합을 갖듯 화톳불에 둘러앉아 ‘하나의 중심’을 야금야금 격하시키는 풍경은 독자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성실한 서기(書記) 김종광이 율려·문단·탄광촌·쇠북공기·혼주시 등에서 받아 적어 온 목소리들은 어쩌면 사라지는 게 마땅할 것들이다. 그 어떤 발화 지위도 갖지 못한, 바구미 같은 인물들이 전체적인 시각을 담보하지 못한 채 ‘중심’을 갉아먹는 행위는 ‘중심’의 관점에서 하찮고 한심하다. 하지만 이 발화들은 저자의 선택적 발굴·배치에 의해서 전복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목소리의 배치에 있어 병렬구조는 무한개(∞)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편 「율려탐방기」에 등장하는 ‘(주)지리나라’ 탐방객 15명의 탈역사적인 수런거림은 신성하다. 이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예측할 수 없는 너울처럼 몰아닥침으로, 홍길동이 세운 이상국(理想國)인 ‘율려’는 역사 위로 부상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지리적으로 제주도보다 가까운 이상국은 탐방객에게 과연 무엇일까. 김창호(12세)에게 율려의 “허생거리는 서울 명동과 비슷했”고 어른들이 경탄한 율려의 바다는 “그게 그거”였다. 그보다 탐방 내내 “지혜년이 덕구와 딱 달라붙어 있”어서 화가 났다. 똘똘한 선지혜(12세)는 백 년 동안 쌓았다는 율려성을 보면서 “자기들을 위해 사람들을 말과 소처럼 부”린 사람들을 비난하고 “민주주의가 참 좋은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날 저녁 첫 생리를 하고 율려성 따위는 잊어버린다. 팽이(35세)는 간밤에 술을 마시고 자신의 “사타구니 속에 손을 들이밀기도 했”던 여자를 “덮쳐줬어야 했는데”, 그만 요량에 그친 게 못내 억울할 뿐이다. 이 가운데 투어가이드 서성철(39세)은 “율려공화국은 율려매춘국”이라고 독자에게 고백한다. “종교내전으로 초토화가 된 이 나라는, 강대국 군인들의 매춘기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등등 다양한 사적 음성이 율려국을 기만하고 조롱한다. 세계정세 속에서 유토피아는 허상이며, 그 역사는 신화로 잘 차려입은 독재의 산물일 뿐이다. 이렇게 변두리의 목소리는 ‘해체’보다 더 가혹하게 중심을 소외시킨다.
「낙서문학사 창시자편」과 「낙서문학사 발흥자편」은 파급의 힘이 더 세다. 저자가 조명하는 인물 ‘유사풀’은 ‘낙서문학’의 창시자다. 그는 ”작부의 아들이며 광부의 아들”이고 초등학교 “3년 동안 9,679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상 시 전집』을 읽은 뒤부터 ‘낙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학한다는 작자들은 옛날 놈이나 당대 놈이나 한결같이 이상의 낙서를 모독하고 있어.”라고 푸념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동창 김배인이 보기에 “낙서 나부랭이를 문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고, 찬양하고, ‘유사풀 낙서문학상’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사기극을 벌이는 자들”이 못마땅하며, “놈이 쓴 글은 절대로 낙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중학교 동창 박호현은 그를 “개잡놈”이라 불렀고, 학과 10년 선배 양우석은 “녀석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녀석은 유명해 졌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대학동기 조미연은 “나는 젊었을 때 죽지 못해서, 이렇게 이름 없는 작가로 늙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유사풀’의 혈육 유하늘을 낳은 홍예지는 “죽어야한다. 그래야 내 문학이 살아나고, 낙서문학이 위대해진다. 나는 죽어야만 한다.”고 주절대다가 “소원대로, 그는 죽어버렸”으니 그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말한다.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유사풀’과 ‘낙서문학’은 정말 “21세기 문학”일까. 아니면 홍예지의 말처럼 “문학이라는 게 영 사기판”인걸까. ‘주례사비평’을 열심히 쓰고 하객들의 박수를 받았던 문단권력과 자본이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동행’에서, 고액의 원고료로 작가들을 유혹·조롱하는 거대자본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3S가 이념인 국가를 배경으로 ‘인간해방’의 정의(正義)가 수시로 뒤집히는 「절멸의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싼 매립장’을 둘러싼 분쟁 탓에 혼란에 빠진 혼주시를 배경으로, 전투경찰 박민욱(21세)의 입을 통해 “집회 참여자들이 옳다 싶을 때가 많았지만, 깊게 생각해 들어가면 그게 아닌 것 같을 때도 많았”(p318)으며 “집회 참여자들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집회가 발생하도록 만든 누군가들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조싼은 헤맨다」. 경영인과 노동자의 파워게임 사이에서 점점 몰락하는 ‘쇠북공기’를 시간 순으로 담담하게 기술한 「쇠북공기전 망징패조편」. 가상현실이 현실과 맞닿은 지점, 그 공간에서 ‘비겁한 폭력’이라는 교집합을 발견하는 「단란주점 스타크래프트」. 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 모두 김종광의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그가 연령과 계급, 계층 등을 망라해 대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냉정하고 날카롭다. 이 ‘수런거림’의 ‘틈’을 포착한 그는 분명 한층 더 성장했다. 외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의 정서는 변함이 없지만, 웃음과 낙관의 굴곡을 주로 드러내던 전작에 비해 확실히 치열해졌다. 나는 김종광을 두고 드문 입담을 무기로 가버린 시대와 촌스러운 도시와 사람을 노래하는 전원작가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낙서문학사』는 그를 문제작가의 반열(班列)에 올려놓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는 평론가 김성실의 말대로 “한국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계보를 잇는 인물”이 분명하다. 지난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로 김종광과 그의 작품 『낙서문학사』가 언급된 사실이 나는 기쁘다. 다른 후보작의 호불호(好不好)와 별개로, 김종광이 수상했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다음해에는 부디 김종광이길.
- ‘이야기’의 경상도 방언. 이는 민담(民譚)이나 구술(口述·口碑·口傳) 문학 또는 민속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동화나 지역전설 외에도 야사(野史)·일화(逸話)·우화(寓話)·우스갯소리·성(性)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 등 소재에 제약이 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