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당신의 절망이 더 깊어서 참 다행이에요.”

니시무라 겐타(西村賢太), 『고역열차(苦役列車)』, 다산책방, 2011.(‘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너는 비참한 사람이다.”라고 말해준다. 또래 남자들이 대부분 갖고 있지만 나만 없는 것들, 가령 직장, 4대 보험, 가정, 대출금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침착한 목소리로 변명도 해보지만, 가정(假定)은 가정(家庭)에 이길 수 없다. 나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척을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이런 슬픈 말을 들은 후에는 나도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겠다던 계획도 잊어버리고) 벌렁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신중하게 해보는 것이다.

과연 나도 한 주에 최소 40시간씩 일할 수 있을까? 4대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장님의 구취를 참을 수 있을까? 슬림핏 슈트가 곧잘 어울리는 내가 (건강을 해쳐가며) 야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하지만 자기반성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대신 ‘예전엔 나보다 참을성 없고 모자란 놈이 퍽 많았는데…’라는 비통한 회고를 당연스럽게 하는 것이다. 기만적인 착각이겠지만, 자기 비하의 늪에서 우리가 딛고 설 사람은 항상 있다. 없으면 만들어 낸다. ‘나는 우주에서 제일 못생겼어.’라며 절망하는 순간, 나와 쌍둥이로 오해받는 친구의 얼굴이 이미 양악수술까지 마친 ‘애프터(After)의 얼굴’이라는 점을 떠올리곤 편안히 잠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절망’으로 ‘우울’을 극복하는 일. 이것은 (큰 위안이 되지만) 몹쓸 짓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하반신이 마비되어 스스로 대소변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추간판탈출증을 견뎠다. 그리고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과 쓰레기를 함부로 투기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이런 상대적인 우월감은 분명히 저질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공증을 받은 ‘비참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듬을 방법 역시 이것뿐이다. 만약 당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좀 모자란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한들 그게 뭐? 우리는 엇비슷하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우월감을 느끼다가도 돌아서면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시기한다. 매일 수도 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변덕. 그것은 삶과 함께 계속된다.


니시무라 겐타…. 성범죄자의 아들 겐타, 중졸자 겐타, 부두 하역 노동자 겐타, 전과자 겐타에게 일본인들은 커다란 위안을 얻은 것 같다. 그가 쓴 사소설(私小說) 『고역열차』는 “어디까지나 먹고살기 위한 일당 5천 5백 엔만이 그의 목적”(48쪽)인 ‘간타’(작명 감각!)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다. 또한 “많이 변형시키긴 했지만 한 팔십 퍼센트는 당시 있던 사실을 바탕으로”(아쿠타가와상 수상 인터뷰) 쓴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가 느끼는 감동과 위로와 웃음은 ‘한 팔십 퍼센트’가 끌어안고 있는 ‘사실’에서 탄생한다. 사소설이란 장르는 “저자의 상황이 곧 작품”(인터뷰)이다. 그 어떤 작가가 사소설에 “하루에 두 번이나 뭔가를 얻어먹은 경험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다.”(53쪽)라거나 “하루 일과에 속하는 자위행위에서 (친구의 애인인) 미나코를 써먹기로 했다”(115쪽)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니시무라 겐타는 모든 것을 털어냈다. <두시탈출 컬투쇼>에 방귀 일화를 보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극단적으로 찌질한 생활’을 스스로 폭로해 버린 것이다.

비참한 폭로 덕에 니시무라 겐타와 독자는 희망을 얻었다. 이런 류의 희망은 허구의 것보다 농도가 훨씬 짙다. 오랫동안 문학청년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나 역시 자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됐다. 여전히 멋대로 사는 난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2011년 현재, 나는 니시무라 겐타보다 덜 행복한 사람이다. 고역열차의 마무리는 “그는 그냥 그대로 일용노동자였다.”(129쪽)로 끝이 나지만, 현실에서의 켄타는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라는 144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2011년)하고 『암거의 숙소』로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2007년)했다. 심지어 꺼릴 것 없어 근사한 수상소감까지 남겼다. “수상은 글렀다 싶어서 풍속점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축하해줄 친구도 없고, 연락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그는 ‘가와바타 상’과 ‘야스나리 문학상’의 수상에 기대를 걸고 있다. 비록 그가 “줄곧 암흑 속을 달렸는데 꽃이 활짝 펴서 지금 꽃밭을 달리고 있죠. 그런데 전 알아요. 금방 다시 길고 긴 다음 터널로 들어갈 거라는 걸요.”(인터뷰)라며 비관적인 세계관을 내비친다 해도, 여전히 일용직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갈지라도, 니시무라 겐타는 더 이상 범상한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는 겐타를 질투한다. (내가 손 놓고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들 덕분에 마음껏 풍속점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 삶을 바꾸지 못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도 있다. “나는 풍속점에 가기 위해서 고된 부두 하역 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어.”라고. 또는 “나는 간타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야. 어른의 태도를 몸에 익힌 상식적인 사람이고 평범한 여자 친구도 있단 말이야.”라고. 하지만 『고역열차』를 읽고 여기서 멈춰 있어도 괜찮을 것일까?

우리는 분명히 소설 속 ‘간타’보다 덜 부끄럽게 사는 사람이며 더 존재감 있는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영리한 멍청이들”(114쪽)로 사는 것일까. 온종일 ‘일하기 싫다.’와 ‘놀고 싶다.’와 ‘먹고 싶다.’와 ‘자고 싶다.’ 이외에 어떤 의지를 지니고 사는 것일까. 우리에겐 의지가 없다. 아니, 의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매사에 투덜거리지만 삶을 바꿔볼 만큼 불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다행인지, 삶의 위협에 노출된 적도 없다. ‘간타’로 남고 싶지 않다면, 평소 자기 신음을 충실히 듣고 꿈을 달래야 한다. 현재의 자신에게 매달려 호소해야 한다. 상상도 하지 못할 바닥에서 우리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온 니시무라 겐타처럼. 폼 나게 살고 폼 나지 않게 죽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혼자라도 창피해하지 말고) 자기 어깨를 힘차게 끌어안자.

“나의 절망이 더 깊어서 다행이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 단편 「나락에 떨어져 소매에 눈물 적실 때」는 개인적으로 더더더 뭉클(?)하다. 제35회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너무 받고 싶은 ‘기타마치 간타’의 고백은 정말 웃프다. “그는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 달관한 척하면서 아무리 스스로에게 체념을 강요한들, 또한 무슨 말로 어떻게 미봉한들 역시 가와바타 상 수상의 영광만은 반드시 거머쥐고 싶었다. / (…)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설령 일회성의 무의미한 소동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하룻밤만은 속일 수 있을 만한 인기를 얻고 싶었다. / 명성을 얻으면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자도 엄청 후회할 것이다. 자신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문학적 재능을 증명받고 그런 유리한 입장에 서서 느긋하게 새 여자를 손에 넣고 싶다.”(177-178쪽)

(+) 니시무라 겐타는 2022년 2월 5일 아침에 사망했다. 54세. 그는 4일 밤, 택시 승차 중에 의식을 잃었고, 다음날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90권의 자필 창작 노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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