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귀가 없다.
나는 독한 침묵이 되기 위해서 숨을 덜 내쉬고 덜 들이쉬고 오래도록 머금는 연습을, 용산 산천동 높은 방 안에서 하고 있다. 그리고 정성껏 침묵이 머물렀던 자리를 둘러본다. 니스 칠이 거칠게 벗겨진 창틀을 쓰다듬거나 못이 박혔던 흔적을 찾아 누런 벽지를 더듬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으뜸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지순례처럼 내 마음이 반듯하게 다듬어지는 착각이 든다.
내가 (허락을 구하지 못하고) 점거하기 전, 이곳에는 한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 이 답답한 방 안에서 그녀는 잦은 신음을 어떻게 삼켰을까. 요란한 우려와 달리 세월은 노인을 손써볼 틈 없이 딱딱한 침묵 그 자체로 만들었겠지. 그날은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더 조용했을 것이다. 조등(弔燈)을 보고 모여든 암묵(暗黙)이나 함구(緘口)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만큼.
침묵(이 된) 할머니의 아들 부부는 근처에서 ‘유진GF’라는 해물·찜 전문 배달음식점을 운영한다. 여기 해물탕의 육수는 “바다가 입안에 펼쳐진다!” 정도는 아니고, 참 깔끔하고 담백하다. 여러 체인점 중 한 곳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침묵으로 터득한 비법 덕이라고 믿고 싶다. 침묵은, 현상의 더께를 걷어낸 눈부신 진리 같은, 멋진 셈법을 통해 언어의 나머지를 버리고 난 뒤 남겨진 가장 중요한 몫 같은, 영혼의 결정이 깃든 마지막 숨 한 줌 같은, 가장 무결한 유언 같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믿고 있다. 어설픈 침묵인 나는 아직 귀가 열려있어서 수시로 의심이 들지만, 그리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