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거봐. 이래서 내가 일하기 싫다니까?

김숨, 『철』, 문학과지성사, 2008.(‘알라딘’에서 정보보기)



김숨. 탐나는 이름이다.

(나의 기호와 별개로) 그녀는 자신의 작명 센스만큼이나 인상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나도 한때 문인스러운 이름을 짓기 위해서 고민하곤 했다. 물론 작명이라 거창하게 생각한 적은 없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봤을 뿐이다. 모자란(큭)·모서리·모기장(엉?)·모바일·모슬포·모피·모임·모음·모방·모창·모산…… ‘모’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낱말에는 어째 피가 당기지 않는다. 필명이라고 하면, 오래전에 헤어진 부모·형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어화둥둥 업고 다니며 보듬을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 날은 ‘김숨’이 썩 마음에 들어서 ‘모숨’으로 스스로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나무지게나 꽃가마를 메고 싶고 “마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짜증이 치밀어올라 그날은 늦은 새벽에 참치 통조림을 따서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그리고 냉장고 위에 있는 짜파게티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보다 더 생각났다. 소설의 감상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그냥 그렇다고.

 

김숨의 장편소설 『철』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작품 속의 조선소노동자들은 맹목적이다. “쌀농사를 짓기에는 땅이 척박했고, 석탄 같은 자원도 나오지 않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철도와 부두도 없”(14쪽)는 곳에서 ‘노동’의 신성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善)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만 갈구했다.”(19쪽)

‘절반은 저항하지 않는다. 또 절반은 저항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김숨은 장편소설 『철』에서 ‘철(鐵)의 시대’를 위와 같이 그린다. 김숨이 형상화하는 ‘철’의 세계란, 자본으로 극대화한 ‘물리적 힘’을 녹여서 결국 ‘녹(綠)’을 생산하는 곳이다. 하지만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종교로써 숭배한다. 노동자들은 아침마다 규칙적인 발소리를 내며 북쪽 조선소로 가,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을 망치로 두드려 철판을 만든다. 그들은 ‘위대한 철선’만 완성되면 “평범한 노동자에서 위대한 노동자로 격상될 것이라”(114쪽)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마모된 조선소 노동자들은 줄줄이 노동을 박탈당하거나 자신들이 만든 녹으로 인해 폐병에 걸려 격리수용 된다. 이러한 처우에도 마을 사람들은 조선소의 주인이 옳다고 생각하며, 제공해 주는 노동에 대해 감사한다.

소설 속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는 아직 우리들 주변에 살아있다. 그들은 시멘트나 철근과 더불어 근대화의 자재로써 사용되었다. 김숨은 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럼에도 조선소노동자들,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는 노동에 자발적으로 ‘신성’을 부여하는 조선소노동자들의 맹목은 독자의 측은한 감정을 유발한다. 그들은 내 아버지다. 또한 내 어머니이다.

나는 김숨의 장편 『철』을 덮으며 지난해에 읽은 단편 「침대」(김숨, 『침대』, 문학과지성사, 2005.(‘알라딘’에서 정보보기)를 떠올렸다. 둘은 분명 다르지만 어떤 면에선 유사하다. 「침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 “그녀는 정지된 것만 같은, 고요한 표정과 몸짓으로 침대에 다다랐다.”(43쪽) 이어 “그들은 그녀가 침대를 지켜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녀밖에는, 그 침대를 온전히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끼리 그녀가 침대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암묵의 합의를 본 듯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부여된 하나의 권리이자, 하나의 의무라고 그들은 말했다.”(43쪽)고 기술한다. 여기서 ‘침대’가 상징하는 바는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육체가 “마침내 닳고 또 닳아 거품조차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작아진 빨랫비누 조각”(73쪽)이 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침대를 지킨다.

왜?

그녀는 왜 “침대 곁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의 권력이자 하나의 의무이며, 하나의 희생이자 하나의 도덕이라고 믿”(73쪽)는 것도 아니며, “하나의 축복이자 하나의 시험이라고 믿”(73쪽)지 않으면서도 ‘침대’를 지킨 것일까. 도대체 ‘침대’가 무엇이기에 ‘그들’은 의무를 부과하고 ‘그녀’는 이를 묵묵히 수행했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노동’이다. 어떤 믿음도 없이, ‘침대’를 지켜야 했던 이유는 “바위가 갈라지듯 가랑이를 벌려 종이꽃들을 품”(74쪽)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 붉은 종이꽃을 품는 행위는 어떤 ‘노동’과 다르지 않다. 즉, 이것은 남성 주체인 ‘그들’로부터 주어진 ‘여성의 노동’이다. 김숨의 작품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노동’은 이처럼 모두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전 단편들에 비해 『철』은 여러모로 선명해졌다. 비록 ‘꼽추’를 제외하곤 주체적 인물이 부재하고, 중심 서사를 ‘소문’이 끌어가지만, 조선소노동자를 움직이는 것의 실체는 선명하다. 물론 조선소 주인은 아무도 본 적 없다. 그는 ‘확성기’를 통해 “근면, 성실, 진보, 지향”을 외치며 노동을 부추기는 음성적 존재로만 드러난다. 그것은 일종의 ‘말씀(Logos)’이다.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로고스’며, 동시에 ‘자본’이다. 「침대」가 남성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철의 공간은 자본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자본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노동을 갈취한다. 이 폭력성은 등장인물 ‘김만도’등의 회의(懷疑)에 의해 단편적으로 인지된다. 독자는, “철선은 어쩌면 녹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무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라는 독백 등을 통해서 그들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낙원(樂園)’이라고 믿었던 ‘철’의 세계가 ‘녹’의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는 일. 그것은 대단한 고통이다. 철의 세계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의미한다면, 녹은 그것의 부식과 붕괴다.

그렇다면, ‘노동’은 우리를 마모시키는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함에서 비롯된 형벌이 노동인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황금의 시대가 가버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여전히 노동은 그것 자체로 신성한 것인가. 경제개발과 발전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순교’의 요구는 노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사실 그들은 ‘위대한 노동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비인간적인 착취였을 뿐이다. 반면 소설 속에 젊은 청년들은 조선소를 원망하고 조선소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소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240쪽)다. 이 “자괴감과 울분”은 망치로 확성기를 부수는 폭동으로 폭발한다. 청년들에게 조선소는 ‘낙원’이 아니며,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민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대도시로 떠나거나 사기를 치고 약탈을 한다. 이 또한 어떠한 의미로든 진정한 ‘노동’과는 다를 것이다. 

여기서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동’은 대체 무엇인가?

김숨은 매우 경제적인 문장을 쓴다.

장편소설 『철』에선 김숨의 ‘문장경제관념’이 조금 헤퍼졌다. 그것은 시에 조금 더 인접해있는 ‘단편소설’이 아니라 서사적 재미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장편소설’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수의 여타 작가들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자재를 아껴 쓰고 있다. 소박한 언어들로 문장을 직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평범하거나 밋밋하지 않다. 『철』의 등장인물인 꼽추의 철-틀니처럼, 그녀의 금고 속에도 수많은 어휘들이 시간은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김숨의 언어들에 있어 이 시간은 ‘제련의 시간’이다.

그리고 김숨은 어느 날, 금고를 활짝 열고 ‘위대한 철선’의 주인이 되겠다며 대단한 소설들을 쏟아내지 않을까? 그런 고집스러움이 그녀에겐 보인다.

 

소영현은 해설 「철의 시대를 기억하라」를 통해 “현실의 트리비얼한 일면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앙상한 얼개와 골조를 드러내는 김숨 특유의 추상능력”(260쪽)을 높이 평가한다. 김숨의 소설에서 보이는 ‘추상능력’은 분명히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기괴함이나 그로테스크로 규정되던 김숨의 작품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다. 그녀가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세상의 모든 폐언어를 집어삼키고 녹여버린 뒤, “점멸하듯 사라져버릴까 두려워”(259쪽)할 필요 없는 ‘위대한 철선’을 공개할 날이 기대된다.

 

덧. 어라라? 출간일이 내 생일이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생일 선물 접수를 못 하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대인배랍니다. 자세한 접수 방법은 댓글을 남겨주시면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조금 망설여진다면 “모군 잃고 택배기사 부른다”는 속담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뱅자맹 콩스탕, 『아돌프』, 열림원, 2002

우린 좀 더 조심스럽게 말해요 뱅자맹 콩스탕(Henri Benjamin Constant, 1767~1830), 『아돌프(Adolphe)』, 열림원, 2002.(‘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사랑하는 이들은 제어할 수…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2

방책을 잃어버린 혹은 방책이 없는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2.(‘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전라도 어디 석상리에서였지? 철새 떼가 매일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