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전신에 화상 자국이 있는 남자가 바로 옆 열 통로 좌석에 앉았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남자를 곁눈질했다. 남자는 당연히 그 시선이 거슬리는 눈치다. 나는 화상 흔적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한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 비록 불가피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할 상황이 아닐지라도, 달리 회피할 방법이 없을지라도, 그는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진짜 이유를 줄곧 알지 못한 채 화상 자국만 들볶을 것 같았다.

피해의식이나 수치심이나 열등감이나 강박, 그 비슷한 감정도 그런 것 같다. 캄캄한 방 안에서 혼자 누워 주위를 더듬다 보면 그런 게 가장 먼저 손에 잡힌다. 자리끼처럼 늘 머리맡에 두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딱 쥐기 좋게, 모나게 생겨먹었다. 인정머리 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것들에 관한 한 나도 잘 안다. 내가 전문이다.

남자의 이어폰에선 티-아라의 노래가 나오고 있다. 이 익숙한 선곡은 멜론 4월 5주 탑100이 분명하다. 나는 남자에게 깊은 화상을 입힌 ‘그 불행한 사건’이 고막에까지 해를 입힌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불길에 포위된 ‘얇고 투명한 두께 0.1mm’의 불쌍한 고막을 떠올렸다. 고막은 “나를 모두 태우면 죽음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으리.”라고 허세에 찬 노래를 불렀고, 이에 불길은 죽음의 고함을 들을 수 있도록 미약한 청력을 남겨주었다는 억지 섞인 이야기도 생각해 냈다. 만약 이 남자가 티-아라의 노래를 듣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직장 상사가 열쇠 보관 장소에 대해 물었고, 남자는 매우 조리 있게 위치를 설명했다. 그는 직장에서 상당히 신임 받는 듯 들렸다. 나는 (피부 미남이자) 자발적 청년 실업자인 내 처지와 현업에서 물러난 부모님의 신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남자에 관해 생각한 모든 것들은 오히려 내가 지니고 있는 열등감이나 수치심이나 강박, 그 비슷한 감정일지 모른다.

그사이 옆자리에선 왼손 엄지손가락이 없는 할아버지가 클립에 기차표 영수증과 돈을 끼우면서 쩔쩔맸다. 잡는 손과 끼우는 손을 맞바꾸면 손쉬울 것 같았지만 그냥 조용히 있었다. 모든 일엔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내가 나의 사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관철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요구해선 안 된다.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도덕률이다.

손에 든 쓰레기를 버리러 차간으로 나가던 한 남자 아이가 문턱에 발이 걸렸다. 당황했음에도 이내 바닥에 앉아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 참말 대견했다. (나의 조카도 이렇게 커 주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을 관람하는 도중에도 나는 여러 번 고개를 들었다. 하얀 다리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나의 본능은 나를 배반했다. 의지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의지는 변절한 게 분명했다. 나의 의지는 대체 무엇과 공모했나. 한 열세 번쯤 그런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자기 주제를 모르는 체하며 아름다움만 좇는 피부 미남이다. 나는 언제쯤 나의 추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내 오랜 고민인 ‘역무원의 차내 방송용 말투가 지닌 생명력의 비밀’은 이번에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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