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20110110 (월)

나는 더블 침대와 텔레비전 한 대가 자기 세계의 전부인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항상 비민주적으로 훌쩍 떠났다, 내게 그랬듯이. 나는 최근에야 내 세계의 체지방을 줄이고 있다.


20110115 (토)

연구실에서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받았다. 유기농 커피를 생산하는 히말라야 마을 ‘아스레와 말레(Aslewa Male)’가 떠올랐다. 아스레와 말레란 ‘좋은 사람들이 여기 정착하다.’라는 뜻이라 한다.


20110123 (일)

바셀린으로 고운 죽을 끓여 한 그릇 비우면 튼 마음도 보송해지겠지.


20110125 (화)

내가 그토록 정성스럽게 일군 ‘무변의 세계’가 나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


20110126 (수)

16쌍의 형광등, 4대의 온풍기, 3대의 가습기가 오직 날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부끄러움을 기록하는 동안에도….


20110127 (목)

단편소설 하나 읽고 책을 덮었다. 눈앞의 포스트-잍 플래그를 내 생 곳곳에 붙이고 싶어졌다. 하지만, 색인할 곳이 없다. 쩍쩍 하품이 나와서 스마트폰에 ‘FourSquare’를 설치했다. 나는 여기 있다. 내가 지루하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20110127 (목)

몸을 비틀어 뒤를 봤다. 창백한 여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가방 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나는 여자의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거울 안에는 나도 여자도 없었다. 난 여자가 보고 있는 거울의 안이 궁금했다. 하지만, 엿볼 기회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20110129 (토)

“아무런 감정적 장식 없이,” ― 김병익의 작품 해설을 읽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서툰 화장을 불안해하며 기약 없이 밤거리를 쏘다니는 기분이다.


20110129 (토)

남문서점에서 25일 발송한 헌책 여덟 권이 거리에 묶여 있다. KGB 택배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문 두드리는 상자들’의 내용물 중 책은 나를 열락(悅樂)으로 끌지 못한다는 점을.


20110130 (일)

“감정적 장식”으로 수놓은 내 서술은, (재현의 대상인) ‘관념’ 혹은 ‘실재’로의 도달을 방해하거나 오염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이 물음을 안고 한 해를 살게 될 거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파편, 2020년 03월

20200303 (화) 조카3호 인스타그램이 추천계정으로 떴다. 신입중딩그램이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사진이 없다. 뉴비라서 친구가 열 명도 안 되길래…

책방무사의 처음 보는 여름

책방 무사 주인 요조는 작은 일에도 공을 들였다. 길 건너에 내어둔 화분은 해의 기울기에 따라 책방 가까이 옮겨졌다.…

멸종 위기의 인류와 조우하다

오랜만이었다. 무작정 싸움부터 걸어오는 사람은 멸종된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 발견했다. 귀갓길에 한 음식점에 들렀다가 출입구 앞에서 담배를…

젊은 여자의 말을 조심하세요

롯데상품권 카드가 굴러들어와서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출구들 사이에서 한참 멍청히 있었다. 모든 출구가 롯데백화점과 이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