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2 (토)
그냥, 사람을 끌어안고 싶다.
20120602 (토)
너의 애인을 봤고, 확신했다. 착한 글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게 쓰겠지만 아름다운 글은 절대 쓸 수 없을 거라고…. 이런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20120602 (토)
ㄱ에게 위로를 받았다. ㄱ의 위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ㄴ에게 위로를 구했다. ㄴ의 위로는 나를 더 괴롭게 했다. ㄷ의 위로를 기다린다. ㄷ의 위로를 기다리기 시작하면서 내 괴로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순간. 괴로움이 없었다면 ㄷ의 위로를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거다.
20120603 (일)
되돌릴 수 없다는 건 참 다행이다. 사람들에 의해 과거가 되돌려진다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들은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하긴. 그래도 좋겠지.
20120603 (일)
햇살 내려앉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 라고 되뇌어도 본다. 하지만 행복도 불행도 상대적이어서 이만하면 대체로 나쁘다.
20120603 (일)
좁은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숨만 간신히 쉬고 있다. 욕실 전구를 갈아보려고 했지만 덮개를 열지 못했다. 샤워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몽키스패너는 커녕 펜치도 못 찾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카카오톡으로 몇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다가 잠들었다.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다. 양쪽 눈엔 피멍이, 주저앉은 코 왼편으로 커다란 밴드가 붙어있다. 그 아래, 기다란 상처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가끔은 이 얼굴을 뜯어내고 싶겠지. 아, 맞다. 자정까지 꽥꽥대며 “이것만이 내 세상”을 연습하던 옆집 남2여1의 혀부터 뽑아내 쟁기질을 하고.
20120603 (일)
영화 《파우스트(Faust)》의 감독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소쿠로프(19510614)는 201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좋습니다.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날입니다.” 나는 종종 그의 대답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내일은 ‘또 다른’ 날입니다. 오늘은 벌써 수십 번 읽었다.
20120603 (일)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결국 나빠질 일만 남은 거야.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담담할 수 있지?
20120604 (월)
나만 볼 수 있게, 자신이 약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나도 볼 수 있게,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말한다. 둘 다 맞을 것이고, 아직 말 못한 이유가 더 있다면 그것 또 옳을 것이다. 나는, 너의 과오다.
20120604 (월)
물건을 정리하다가 유통기한을 넘긴 콘돔을 발견했다.
20120604 (월)
5분. 5분 후부터 금식 시작.
20120604 (월)
애초부터 내가 겪기로 계획된 일이었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아슬아슬한 선택이 너무도 많다. 너의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너를 끌고 그냥 자전거를 탔더라면, 새 안경을 샀더라면, 푹신한 공을 샀더라면, 자전거용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상영 시작한 영화를 그냥 봤더라면, 가깝고 좁은 첫 번째 장소에서 공을 주고받았더라면, 안경을 벗었더라면, 한 번 더 겁을 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시골집에 내려가 부모님과 합격을 축하하며 웃고 있을 텐데. 허술한 소설을 뚝딱뚝딱 고치며 짬짬이 당선소감도 떠올려 볼 텐데. 지금처럼 마른 침만 삼키며 잠 못 들지 않았을 텐데.
20120606 (수)
코로 숨을 못 쉬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입이 바싹 마르는 단계를 넘어서서 심각하게 쓰리다. 젖은 거즈를 물고 있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머리-눈-코-입으로 이어지는 통증 때문에 계속 잠을 설치고 있지만 눈을 뜬 채로도 배길 수 없다. 삽관 했던 목도 뻐근하다. 진통주사를 놔 달라고 할까 말까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아침이 왔다. 몇 시간 뒤에 누이가 오기로 했다. 어제는 소리 강과 콧수염 이, 에코 모, 방화범 홍, 방잡이 조가 다녀갔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순국선열들께 묵념.
20120606 (수)
누가 나 전신마취 시켜놓고 멍석말이 하랬어! 당장 나와! 하라는 수술은 안 하고…. 혼자 힘으로 고개도 못 드는 내 처지가 엄청 처량하다.
20120608 (금)
중앙대학교 병원에 다녀왔다. 진료받기로 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수납창구에 들러 수술비와 입원비를 재정산했다. 현충일에 퇴원하느라 건강보험공단에서 승인받지 못한 할인이 적용됐고, 그 덕에 5만 원가량 줄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나는 성형외과 간호사님께 예약증을 건네고 자리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만 기다렸다. 재미있는 점은, 성형외과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연히 터무니없는 느낌이다. 내가 받고 있는 성형외과 진료는 삶의 최소유지를 위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포획되는 얼굴이 되도록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이다.
20120610 (일)
네가 있던 방, 불을 끈다.
20120612 (화)
나도 잘 알지, 그 마음.
20120613 (수)
새벽 공기를 들일 자리가 없다. 조미료에 범벅이 된 음식들이 뱃속에서 뒤섞이고 있다. 맛을 볼 줄 아는 위가 달려있었으면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지 않았을 텐데. 불쾌하게 만들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20120613 (수)
찐득하고 퍽퍽한 닭강정을 느릿느릿 씹고 싶은, 적적한 새벽이다. 피가 천천히 돈다.
20120614 (목)
방화범 홍과 방잡이 정이 다녀갔다. 못난이 수박과 업소용 칠성 사이다는 달지 않았고 야광별은 밤새 빛나지 않았다.
20120616 (토)
방화범 홍이 고시원에서 절취해 건네준 삼양라면을 부숴 절반쯤 먹다가 나머지를 끓여 먹었다. 남겨뒀던 못난이 수박 절반을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지금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임태산(김수로)이 홍세라(윤세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홍세라는 받지 않았다. 곁에 있던 친구가 홍세라에게 전화를 받거나 꺼놓으라고 말하자, 홍세라는 “못 받아. 받으면 안 찾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걸려오지 않는 전화를 안 받는 방법은 아직도 없겠지.
20120617 (일)
《간기남(The Scent)》(2012)을 봤다. 상복 입은 박시연을 볼 기회를 주신 점은 매우 감사드립니다. 스토리 뻔한 게 뭐 대수인가요.
20120617 (일)
다 알 것 같아. 지금 네 기분도.
20120618 (월)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도서출판비채, 2012). 당연히 예약주문을 했다. 나는 분명 죽을 때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20120619 (화)
휴거(携擧)[명사] <기독교>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 …나는 살짝 떠있다. 구원은 아니다. 잡아당기거나 누르는 힘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잠깐씩 버둥거렸지만 여기서 더 올라가거나 내려가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20120619 (화)
형제는 부모의 온갖 종류의 과잉을 함께 나눠 짊어지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둘 이상인 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이유다.
20120620 (수)
누운 자리 곁에 너의 이름이 떨어져 있었는지 돌아누울 때마다 너다. 집어드는 것마다 구겨지는 것마다 너다.
20120621 (목)
문밖에서 이불이 마르고 있다. 쉴 새 없이 펄럭거리는 마음. 부끄러운 것 투성이인 마음이 홀랑 뒤집어질까 겁 먹고 스스로 가라앉는 매일매일. 오늘도 치욕을 끌어안은 채 베개에 코를 박자.
20120622 (금)
지금 눈꺼풀 아래서 살랑살랑 걸어오는 이가 그이가 맞는 것인지 눈 부라려 쳐다보는 중인데, 눈 감은 채로는 너무 캄캄하고 눈 뜨면 눈알 뒤편으로 달아나버려서 난감해하고 있다.
20120622 (금)
《돈의 맛(The Taste Of Money)》(2012)을 봤다. 욕조에서 자신의 팔을 그은 윤회장(백윤식)은 비장하게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제10곡 휴식(Rast)>을 부른다. 윤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늦었어. 이거… 자살. 인생 패배 선언. 졌어…. 아…. 인생에 있어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게 없어. 쓰레기 같은 인생이지.”
20120622 (금)
다시 만날 수 없을 사람의 연락처를 지운다. 삭제 확인을 누르는 순간, 당신들의 이름을 푱 하고 거둬가는 놀라운 현대성에 경이로운 찬사를 보내는 순간, 이 빈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벌써 기억에 없다. 심지어 내가 금방 기억하려던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당신을 잊는 건 이렇게 쉽다.
20120622 (금)
《소울 서퍼(Soul Surfer)》(2011)를 봤다. 톰 해밀턴(데니스 퀘이드)은 결승전을 앞둔 딸 비터니 해밀턴(안나소피아 롭)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너도 알거야, 파도 사이의 조용한 순간을…. 파도는 아직 안 생기고 어떤 기운만 물 사이로 밀려들지. 기다려야 할 때야. 직감에 귀를 기울여. 믿거라. 알 수 있을 거야.”
20120623 (토)
Anya Marina, <Whatever You Like>
20120624 (일)
“모두의 평화? 난 모두의 평화 같은 거 관심 없어요. 나한테 중요한 건 내 자존심이고 내 기분이야. 난 지금도 댁이 좋지만 이렇게 이용당해줄 만큼은 아니에요. 착각했나 본데, 그런 거 다 상관없을 만큼 서이수 씨가 좋진 않다고. 여기 있어요. 가방 챙겨올 테니까.” ― <신사의 품격> 9화.
20120624 (일)
“한 남자의 진심이 왜 무례였을까? 내가 서이수 씨를 좋아한다는 게 서이수의 영혼, 서이수의 내면, 서이수의 성격뿐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이런 순간에도 난 댁이 참 예뻐요. 그게 열을 받는 거고. …난 마흔하나예요. 서이수 씨와 마주 선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 중 가장 젊은 날이죠. 오늘보단 어제가 청춘이고. 그래서 난 늘 오늘보다 어제 열정적이었고 어제보단 그저께 대범했어요. 그렇게 난 서이수 씨를 만나는 모든 순간 마음을 다했어요. 그래서 그 구두를 신은 서이수 씨를 보는 순간, 참기 힘들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런데 방금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 이 여자는 내 마음을 못 받았구나. 그동안 난 돌 던지듯 던졌구나, 마음을. 내가 던진 마음에 맞아 이 여자는 아팠겠구나. 그래서 이 여자는 놓쳐야 하는 여자구나. 그동안 미안했어요, 신사가 아니라서. 이건 진심이예요. 난 그저께보단 어제가, 어제보단 오늘이 제일 성숙하니까. 그러니 훈계는 그만하는 걸로. 당신이 원한 모두의 평화엔 나의 평화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 <신사의 품격> 10화.
20120625 (월)
내 무관심에 당신이 화가 날까 봐, 그래서 그랬어요.
20120626 (화)
어두워지면 쫓을게.
20120626 (화)
흔들리는 잎들은 파도 소리를 낸다. 잎들이 물방울처럼 군다. 너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여기 없어도 바람이 보인다. 이제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니다.
20120627 (수)
자두 열 알을 단번에 먹었다. 이 허기는 가벼움에서 야기됐다. 가벼운 것은 위에 무거운 것은 아래에. 이 당연한 법칙이 나를 지켜주면 좋겠다. 나는 한동안 아래에 머물 것이고 훗날 스스로 부레를 부풀려 부상할 것이다.
20120627 (수)
《127시간(127 Hours)》(2010)을 봤다. 대니 보일 감독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원래 감독 이름 같은 걸 잘 외워두는 편도 필모그래피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도 아니다. 미인과 영화 얘기를 할 때 거드름 피우며 필모그래피를 줄줄 외는 사람이 되고 싶긴 한데… 다음 생 부터 하기로 정했다. 최근에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재밌게 보는데, 10화나 본 뒤에야 호들갑을 떨며 “<신사의 품격>을 쓴 작가가 <시크릿 가든>을 쓴 작가라면서!?”라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모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에필로그를 보고야 알게 된 거지만, 이 영화는 실화다. 아론 랠스턴(제임스 프랭코)은 혼자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년에서 등반을 하다가 손으로 짚은 바윗돌과 함께 암벽 아래로 떨어진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바윗돌이 한쪽 팔을 깔아뭉갠다. 멀티툴과 로프 따위로 팔을 빼내보려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 상태로 127시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역시 사고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닌가? 내 코뼈를 부러뜨린 경기용 야구공은 ‘이번엔 한쪽만!’이라며 몸을 틀었고, 흉터를 남긴 안경은 ‘실명은 가혹하죠?’ 같은 기특한 생각을 했을지도. 어쨌든 영화의 교훈은 외출할 땐 목적지를 밝히자, 정도랄까.
20120628 (목)
이성을 안고 자는 것보다 베개를 안고 자는 게 훨씬 좋습니다. 우려에 비하면 장점이 퍽 많죠. 아시다시피 베개는 아침에도 입 냄새가 안 납니다. 등 돌리고 자더라도 핀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베개 피를 벗길 필요도 없습니다. 베개의 등에 달린 지퍼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아름다운 이성에 관한 꿈을 꾸세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20120628 (목)
《어메이징 스파이더맨(The Amazing Spider-Man)》(2012)을 봤다. 경향신문 백은하 기자의 리뷰가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다. “마크 웹이 그려내는 피터 파커의 학창시절은 고독한 영웅의 성장사보다는 싱그러운 하이틴 로맨스물에 가깝다. 그의 연출력은 스파이더맨이 뉴욕 빌딩숲을 공중그네 타듯 아찔하게 날아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어린 연인이 학교 복도에서 첫 데이트를 약속할 때 흐르는 간질간질한 공기 안에서 빛을 발한다.” 솔직히 그 외엔 심각하게 지루했다. 재탕재탕재탕. 그리고 엉성한 이음새. 고뇌하지 않는 이 영웅은 그냥 거미다. 거미와 도마뱀이 싸우는 영화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안 봤을 거다. 초대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