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어둠을, 귀가를 늦춰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음악이 멎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긴 의자에 앉아서 긴 그림자들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그림자의 교양 있는 몸짓에 감탄하는 사이, 여자들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명의 여자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엿들을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들리지 않는 줄 안다.

슬립온 슈즈를 신은 여자는 오피스텔에 새 텔레비전을 들여놓던 날에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략 요약해보면 이렇다.

슬립온 슈즈 여자는 연상의 남자와 동거 중이다. 며칠 전엔 동거남의 신용카드로 새 텔레비전을 샀다. 다음날, 배송기사는 예정대로 텔레비전을 설치하려고 오피스텔에 방문했다. 하지만 슬립온 슈즈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문자인 동거남의 이름을 부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여자는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터졌다. 배송기사는 고객정보란에 기재된 일반전화로 연락을 시도했다. 잠시 후, 배송기사는 동거남의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주문하신 텔레비전을 가지고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네? 무슨 텔레비전요?”

“거기가 ○○○댁 아닌가요?”

“네. 제 아들인데요.”

“아드님이 주문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아. 혹시 주소가 ○○오피스텔 ○호 아닌가요?”

“아닌데요? 확인해볼 테니 주소 좀 불러주시겠어요?”

“네…. 배송 주소가…….”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고 갔을 것이다. 동거남은 직장에서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텔레비전을 주문했느냐고, 왜 샀느냐고…. 동거남은 난데없는 질문에 쩔쩔매며 둘러댔을 것이다. 눈치 빠른 어머니였다면 납득한 척 전화를 끊고는 귀가한 남편에게 “놀라지 마쇼. 우리 아들이 동거를 하는 모양이에요.”라고 귓속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옆자리에서 쉴 새 없이 침을 뱉어대던 객담 여자가 갑자기 배송기사의 고객정보 유출을 지적하곤 화를 내기 시작했다.

“미친 기사새끼. 그거 본사에 따져! 따지면 돈 졸라 받아. 몇 백만 원은 받을 걸? 그 새끼는 당장 짤리고. 본인이 아닌데 주소를 말해 줬으면 완전 다 그 새끼 잘못이야.”

객담 여자는 지금 당장 전화를 걸라고 채근했다. 슬립온 슈즈 여자는 “그래?”라고 되물으며 살짝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채근을 멈추지 않는 객담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송기사 때문에 동거하는 거 걸릴 뻔 했는데 진짜 진상질을 해볼까?”

정말 저절로 욕이 나왔다. ‘미친년들….’ 한낮에 자빠져 자느라 동거남을 곤란하게 만들고서 뭐가 어째? 고객정보 유출로 배송기사를 잘라버려? 멍청한 소리를 조언이라고 당당히 해대는 객담 여자와 친구 사이인 걸 보면 더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대체 어떤 남자가 저렇게 염치없고 멍청한 여자와 동거를 하는 걸까. 나는 꼭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앞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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