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에이, 세상에 낙원이 어딨어!

김종광, 『율려낙원국』 1·2권, 예담, 2007.(‘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이상적인 국가의 출현은 이상적인 인간이 출현한 뒤에 가능할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폭력성을 동반한 내부의 경직성과 지나치게 낙관적인 인간관에 의해 붕괴되었다. 바깥의 이데올로기와의 충돌은 그다음이다. 자신에 의한 붕괴 탓에 사회주의 체제의 낭만이 회고될 때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그 어떤 경멸이 자동적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이상적인 국가관에 걸맞은 인간들로 사회 구성원이 채워졌다면, 오늘날 보다 더 낙원에 가까운 국가에서 내일의 시민 대표를 뽑고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신원미상의 사람이 철로에 뛰어든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이 사고로 서울 지하철 1호선 인천 방향 운행이 30분가량 중단”되었다는 사실 끄트머리에 “퇴근길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고 투덜대는 기사는 쓰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원인에 따른 죽음 이외의 선택지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에 관해 고민함으로서 생존의 난이도를 낮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호 8번 허경영이라는 후보가 있다. 그는 사전적 의미의 ‘정치’에 대해 죽음을 선언한 사람들에게 기상천외한 공약으로 큰 웃음을 주고 계시다. “신혼부부에게 1억 원 지급”, “출산 시 3천만 원 지급”,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달 70만 원 지급”은 그나마 현실적이다. “산삼 빅딜 단지 조성을 통해 100만 실업자 고용 해결”, “중소기업 육성정책과 청년실업 대책으로 중소기업 취업 시 매달 100만 원 쿠폰 제공”이란 공약은 꿈만 같다. 게다가 남녀관계는 알 수 없으니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청와대에서 박근혜와 결혼식을 올리겠단다. 어쩌면 그야말로 내가 그려온 신랑감일지도 모른다. IQ 430이라는 그는 1초 만에 사람의 병까지 고쳐버린다니까.


박지원의 한문 소설 『허생전』 속 ‘허생’이 낙원 <율려>를 세웠다. 이곳은 홍길동 장군이 세웠던 <율도국>을 계승하는 국가로, “이 나라의 문젯거리인 도적들을 따로 모아다가, 그들끼리 인과 덕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1권, 75쪽)고자 한 것이다. 그럼 홍길동의 율도국은 어떻게 됐을까? 율려 제도를 지키는 신령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 홍길동이 세웠던 이상국은 “같은 피를 나눈 놈들끼리 싸우고 죽이다가 스러졌”(2권, 10쪽)다. 이 비극의 자리에 상도덕도 없이 매점매석으로 벌어들인 큰돈을 쏟아부어 변산 기슭에 사는 도적놈들로 만든 낙원 <율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율려제도는 “중국 남경과 유구왕국, 일본국 장기도로 삼각형을 그렸을 때, 그 한복판쯤에 있”(1권, 71쪽)다. 그곳은 신령과 교통할 수 있는 도사공 유연기의 도움이 아니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섬이다. 이 폐쇄적인 섬에서 허생이 공표하는 정책들은 낙원의 의미를 점점 변질시킨다. 허생은 “글자를 가르치면 바로 나라는 망하네. 우리 조선이 왜 그 모양인 줄 아는가? 바로 글자를 아는 것들이 글자로 세상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시민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쓸 줄 아는 것이 훌륭하다면 인간을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것은 더 훌륭한 일이다.”라는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시민관과 반대에 선 것이다. 우매한 시민 도적들은 점점 술과 도박과 간음에 빠진다. 허생은 이를 금하기 위해서 ‘율려법’과 ‘율려도덕’을 공표하고 ‘사대 범죄 금지령’을 발효한다. 그 내용은 “간음하고, 술 마시고, 노름하고, 불교나 이순신 장군을 믿으면 손모가지와 모가지를 자르겠다는”(2권, 144쪽) 것이다. 이 ‘피의 통치’는 보름 만에 “사천여 개나 되는 손모가지와 백여 개의 모가지를 잘”(2권, 150쪽)라 버리기에 이른다. 그 결과 율려국엔 범죄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죄들은 단지 더욱더 음지로 숨거나 율려법의 집행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허생은 “이토록 낙원은 이루기 쉬운 것이었구나. 자유와 평등이 금모래빛으로 찰랑이고, 만백성이 하루 서너 끼를 배불리 먹으며, 법이 칼처럼 지켜지며, 도덕 정신도 훌륭한 나라를, 나는 이루었구나. 너무도 빨리 이루었구나. 불과 일 년 만에 이상 낙원을 완성했단 말이다.”(2권, 230~231쪽)라고 자찬한다. 술을 마시거나 수투와 간음을 한 이들의 손모가지를 죄다 잘라놓고 낙원을 이뤘다고 기뻐하다니.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통치자는 그 누구에게도 이 신조를 믿도록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신조를 믿지 않는 자를 국가에서 추방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 도적들이 어디로 추방될 수 있단 말인가. 신령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들고 날 수 없는 곳에서 달아나려 해봤자 바다에서 죽어갈 뿐이다. 이런 땅에 도적들을 던져놓고 채 1년이 되기 전에 허생은 조선으로 떠난다. ― “장군이 떠나신 것이다! 그들을 버리고. / 하여 이제 장군 없이, 그들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2권, 251쪽)

허생 장군이 떠나버린 낙원 <율려>. 진짜 이야기는 3권부터다. 돈과 권력으로 통치한 영웅 허생이 떠나버린 율려, 그곳에 남겨진 도적들이 만들어가는 낙원은 어떤 곳으로 굴러갈 것인가.

연암 박지원의 환상동화 『허생전』은 김종광을 기획대로 “고전패러디 리얼판타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김종광은 「작가의 말」에서 “나는 선한 영웅, 착한 권력을 믿지 않는다. 영웅 허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웅주의적 발상을 가진 허생과, 그런 인물에게 휘둘린 군상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웅 허생의 인생보다, 그 군상들의 인생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착한 허생보다는, 도적들이라는 군상(민중)의 지리멸렬한 삶과 투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2, 261)이라고 토로한다. 즉, 율려는 김종광에게 시민역사실험의 장이다. 비록 율려의 의미―“율(律)과 여(呂)는 둘 다 조절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둘을 합친 ‘율려’는 예로부터 음악을 일컫는 말이었다. 자고로 성군은 음악을 들고 세상에 나타났다. 중국의 전설적 임금 요순 황제가 그랬고, 한반도에서는 삼국 통일 후 신문왕이 신기한 대나무 피리로 태평성대를 열었다.”(1권, 9쪽)―는 점점 퇴색될 게 자명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직시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인류는 그렇게 선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그의 전작 소설집 『낙서문학사』의 한 단편 안에서 묘사된 <율려>는 ‘창녀들’이 모든 경제활동의 기반이 된 나라다. 그리고 다른 단편에선 ‘낙서문학’을 국민투표를 통해 서열화하는 국가다. 오늘날의 율려에서 평론가는 창녀만도 못하다. 이제 율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투쟁의 역사’를 말한다. 그 투쟁의 과정은 우습게도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며칠 뒤 우리가 행사하는 한 표는 우리를 낙원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나는 모두의 낙관적인 기대가 모두 역사가 되길 누구보다도 절실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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