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변은 매우 그럴싸하다.
모몰(冒沒) 씨는 용산구 이촌동에서부터 한강대교(제1한강교란 이름이 더 애틋하다)를 건넌 뒤, 강변을 따라 동작구 흑석동까지 걷기로 마음먹었다. 별난 이유는 없었다. 선선한 밤이었다. 어떤 가정에선 가족들이 모여 앉아 통속드라마를 시청하는 밤 10시쯤이었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다. 모몰 씨에겐 본방송을 방어해야 할 드라마도 없고, 둘러앉을 가족도 없다. 그렇다고 속없이 밤늦게 불러내 커피 한 잔 기꺼이 함께 마실 만한 사람도 없다.
모몰 씨는 자신의 딱한 처지에 비해 무덤덤하게 트럼프월드 앞 횡단보도에 섰다. 한낱 신호조차 바람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바뀌기만 해보라지. 모몰 씨의 오른발은 차도 경계를 들락날락했다. 정작 신호가 바뀌자 태도도 돌변해 가슴을 내밀고 느긋하게 길을 건넜다. 고작 몇 미터를 사이에 둔 고급 차 운전자 한둘은 웃음을 픽 내뱉었을 것이다. 허세 밴 사람은 허세를 단번에 알아본다. 한강대교에는 모몰 씨처럼 걷는 사람도 많았지만 쫄바지를 입은 자전거 청년들이 더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단단한 엉덩이가 좀 부러웠다. 철재 가드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와 반짝이는 알루미늄 프레임의 자전거도 당연히 부러웠다.
하지만 산책은 귀족적이다, 라고 모몰 씨는 믿었다. 산책은 생산과 매우 동떨어진 행위다. 이런 자존심으로 버티는 것이다. 건너편에는 네 명의 여학생이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어두운색 티셔츠를 입은 밝은 아이들이었다. 거리가 워낙 먼데다 날이 갈수록 눈이 침침해져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학생들은 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네 방위로 진용을 갖춘 다음 한 무리 광대처럼 춤을 췄다. 흥겨운 춤이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추임도 이어졌다. 저 이상한 퍼포먼스를 운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운전자, 그들은 뛰어난 인류다. 집까지 시속 60㎞로 달려가면서 무언가를 맞닥뜨리고 결정할 때마다 알을 낳는다면 그들은 아프리카 병정개미쯤 될 것이다. 노면 사정, 정체 정도, 다양한 경로, 교통체계, 풍경, 전조등과 후미등의 표정, 옆 사람의 잔소리, 라디오, 휴대전화, 근심들, 그리고 그린피스. 게다가 저런 광대 여학생까지. 모몰 씨는 그래서 운전자가 되는 일이 겁이 났다. 변명이거나 말거나 자신만 그렇게 믿으면 된다.
한강은, 늦은 밤 한강대교 위에서 보는 한강은 더없이 그럴싸하다. 검은 강에 서린 귀기(鬼氣). 도심 허공에 부적처럼 매달린 가로등과 사이사이 섞여 있을 누군가의 조등(弔燈). 강변을 따라 빨간 조끼의 아주머니가 어디론가 바삐 간다. 드라마 《쩐의 전쟁》이나 《메리대구공방전》은 얼추 끝나갈 것이다. 잠실 방향에선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냄새가 끈적끈적한 바람에 섞여 불어온다. 그곳 숲엔 아직 커다란 뽕나무가 있어서 누군가 은밀히 거세를 당할 것 같다. 조선 시대의 이런 날처럼. 푸르게 빛나는 노들섬의 무표정함과 짝을 이뤄 맥 빠진 오데 코오롱 향기가 적요하게 떠돌고 있다, 라고 모몰 씨는 느낀다. 그리고 삼박거린다. 밤의 강변 풍경엔 이런 광휘가 있다. 그리고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멩이의 마음. 심연을 보고 온 기분이 되었다. 생이 이울며 퇴적된 깨달음이 모몰 씨의 마음속 분쟁을 조금 걷어냈다.
모몰 씨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변으로 내려가는 목을 따라갔다. 강물이 모몰 씨 옆에서 나란히 걸어줬다. 바람은 강물과 모몰 씨의 침묵을 엿들으며 지나갔다. 딱히 말은 필요 없었다. 대신 모몰 씨는 발목에 전해지는 무게를 가늠했다. 매일 내 무게를 달아 봤던 그 여자는 잘 지내고 있을까? 모몰 씨는 강 건너에 보이는 가로등을 한 다발 뽑아 여자에게 배달하고 싶어졌다. 어떤 메모가 좋을까. 모몰 씨는 촌스럽게도 ‘내겐 존재의 허위만 보이는 철 가면이 씌워져 있다. 이건 내게도 형벌이다.’와 같은 현학적인 문장을 좋아한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여자가 모몰 씨를 긴장시킨다. 모몰 씨는 놀라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메모를 고쳤다. ‘옛사랑의 성분은 방부제가 9할이다.’ 그는 자전거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모몰 씨가 걸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어떤 빛줄기가 어슴푸레 내리쬐고 있었다. 반짝이던 옛사랑에게서 이런 빛줄기가 보인 것도 같다. 그는 ‘누군가의 파멸이 주제인 어느 신탁’의 데이터를 서버로부터 전송받는 중인 것처럼 무방비로 서 있었다. 경험상 이런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은 위험하다. 그럴수록 모몰 씨는 더 흥미를 느껴왔고, 인생이 이 모양으로 찌그러졌다. 하, 하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페달에 발을 올리고 흰 다리 근육을 사용해 우리에게 아주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사람에게 흥미를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다소 뻔한 연출이지만 모몰 씨는 매번 넘어가곤 했다. 신탁의 뇌관을 건드린다고 하더라도. 모몰 씨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조심스럽게 피해 간다. 호기심에라도 돌아볼 용기가 없다. 대신 오른쪽의 흙을 바라본다. 아주 고운 흙이다. 건조한 날이 이어져서인지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다. 강을 곁에 두고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흙의 갈증, 그 증거. 잡초가 보인다. 어머니는 내일도 텃밭에서 저리 독한 잡초를 뽑겠지. 호미로 잔뜩 캐서 고랑에 훠이 집어던질 것이다. 모몰 씨는 곧 고향에 내려가서 고된 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촌스럽게 얼굴을 태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모몰 씨는 계속 걷는다. 길은 멀다. 먼 길은 어느 시점부터 추억으로 걷는다. 나는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라던가. 보들레르의 시구이며 박 선생님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진작 사두고 아직 읽지 못했다. 읽어야지.
둔치로 내려온 뒤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 롤러스케이트보다 쉽나? 분홍색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집 앞 인도를 빙글빙글 돌며 “삼촌, 저 잘 타죠?”라고 묻던 조카의 환영이 쌩 지나가다 사라지기도 한다. 새카만 강물 위로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싱싱 달려가는 모몰 씨의 조카는 아주 예쁘다. 아까는 모몰 씨에게 전화를 걸어와 「첫눈」이라는 자작시도 자랑했다. 시구는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전(2007년 6월 16일 토요일) 백일을 맞은 모몰 씨의 조카 유성이는 롤러블레이드를 아주 잘 탈 것이다. 모몰 씨는… 네가 보고 싶다. 누가? 수현이도 아니고, 지현이도 아니고, 유성이는 더욱 아니다. 불쑥? 무의식은 의식이 항상 통제해야 하는 망나니다. 모몰 씨는 옛사랑이 보고 싶어진 이유를 떠올리기 위해서 머리를 긁었다. 가로등, 강물, 연인, 황무지, 잡초, 산책로, 비구름 냄새. 옛사랑이 보고 싶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다 옛사랑이 보고 싶어질 이유다. 모몰 씨는 항상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그 사람과 함께 걷고 싶다. MP3 플레이어로 노래를 듣고 흥얼거리며 걷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은 기분이 기막히다. 함께 뛰는 심장에 기뻐하다가 맞댄 어깨를 통해 샴쌍둥이가 되길 바라는 순간이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 연인이 저 앞에 있다. 벤치에 앉은 연인. 민소매 셔츠를 입은 여자는 남자의 등을 꽉 껴안고 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등에 귀를 대면, 아주 편안한 비트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아마 그걸 듣고 있겠지? 모몰 씨도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나른한 소리를 조금만 훔치고 싶었다.
모몰 씨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길을 걷다가 주저앉았다. 허리가 아파왔다. 모몰 씨는 나른한 심장 소리를 훔쳐 한두 번 숙면 하는 거로 평생 만족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허리디스크를 치료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든 아프지 말고 잘 자야 한다. 그런 거다. 산책이란, 이렇게 허튼 생각을 하면서 아픈 일을 잊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잊지 못한다 하더라도, 되똥거리며 결국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네가 결락(缺落)된 나를 미숙하게 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