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우리 골목에는 정의로운 인간이 산다. 그는 며칠 전 골목 바닥에 이런 글귀를 남겨놓았다.

“개 주인. 제발 쫌, 가져가세요. 당신 집이면, 이라 생각해 보세요.”

나는 역지사지의 선을 이끌어내며 (비교적) 점잖게 타이르는 그의 태도를 곱게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 사이, 글귀를 가을비가 가무리고 있었던 걸까. 골목에 물기가 마르자 글귀가 여전히 싱싱한 채로 다시 나타났다. 유성펜으로 쓰였다니, 적잖이 혐오스럽다. 굳이 견주자면 나는 지워지지 않는 글자보다 개똥이 훨씬 어여뻐 보인다. 거리에 졸생의 노기를 새기는 이보다 문득 배변하는 개가 더 고상해 보인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젊은 여자의 말을 조심하세요

롯데상품권 카드가 굴러들어와서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으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출구들 사이에서 한참 멍청히 있었다. 모든 출구가 롯데백화점과 이어져…

파편, 2018년 02월

20180203 (토)  H의 결혼식에 못 갔다. 어제 사 온 냉이와 두부를 넣고 찌개를 끓인다. 약 한 봉지를 눈에…

영원히 유실된 1억 분의 1

열흘 전, 벨기에에 있는 구글 데이터 센터가 벼락을 맞았다. 그것도 무려 네 번. 그래서 스토리지 시스템에 전력 공급이…

그래도 세계는 곧 꽃으로 꽉 찰 것이다

꽃을 찾아다녔다. 망울 안에서 부풀고 부풀다 더는 어찌할 수 없어서 핀 꽃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냄새나는 골목에서 지저분한 꽃무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