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우리 골목에는 정의로운 인간이 산다. 그는 며칠 전 골목 바닥에 이런 글귀를 남겨놓았다.

“개 주인. 제발 쫌, 가져가세요. 당신 집이면, 이라 생각해 보세요.”

나는 역지사지의 선을 이끌어내며 (비교적) 점잖게 타이르는 그의 태도를 곱게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 사이, 글귀를 가을비가 가무리고 있었던 걸까. 골목에 물기가 마르자 글귀가 여전히 싱싱한 채로 다시 나타났다. 유성펜으로 쓰였다니, 적잖이 혐오스럽다. 굳이 견주자면 나는 지워지지 않는 글자보다 개똥이 훨씬 어여뻐 보인다. 거리에 졸생의 노기를 새기는 이보다 문득 배변하는 개가 더 고상해 보인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너의 얼굴은 갖가지 도형

가로등 빛이 잡아 끌어 바닥에 내려놓은 나무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서늘한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8의 샤프 펜슬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는데, 나만 남기기로 했는데, 샤프 여덟 자루를 사버렸다. 일본 제품은 꺼려지지만 0.2mm는 대안이 없다고 스스로 설득했다.…

파편, 2013년 07월

20130701 (월) 교보문고 전자책 샘(SAM)을 마련했다. 그리고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중 150권을 10만 원에 구매해서 담았다. 20130703 (수) 오늘은…

김종광, 『율려낙원국』 1·2권, 예담, 2007

에이, 세상에 낙원이 어딨어! 김종광, 『율려낙원국』 1·2권, 예담, 2007.(‘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이상적인 국가의 출현은 이상적인 인간이 출현한 뒤에 가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