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어릴 적부터 황도 통조림과 복숭아 넥타를 싫어했다. 물큰물큰한 꼴로 설탕물 맛이 나는 복숭아를 왜 먹어야 하는지 몰랐고, 그 국물만 따로 담은 넥타에 돈을 지불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넥타(nectar)’는 텁텁 시큼한 맛에 걸맞은 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넥타가 과실음료를 뜻한다는 걸 알기 전에는.

내 반감을 아무도 알 리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황도 통조림과 복숭아 넥타를 내 손에 쥐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부모님 손에 끌려 친지의 병실이라도 찾으면 ‘거기’에는 ‘그것’이 있었다. 나는 (친절하게 캔을 딴) 복숭아 넥타를 건네받으면 내내 들고만 있었다. 쌕쌕이나 봉봉을 주면 바로 마셨다.

당시에는 왜 황도 통조림과 복숭아 넥타가 최고의 병문안 선물이었을까. 과육음료인 ‘넥타’는 ‘과실퓨레(fruit puree)’가 원료인데, 과실의 종류마다 20~50%를 반드시 첨가해야 하는 모양이다. 과실퓨레는 박피·제핵·제심한 과실을 삶거나 갈아 걸러내고 순간살균하여 제조한다. 그러니 100% 주스가 흔치 않던 시절에 나름의 건강음료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액상과당이 얼마나 첨가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생과일주스가 흔해서인지 황도 통조림과 복숭아 넥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병원을 찾아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황도 통조림을 따 주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무가당(이 말도 예스럽네) 주스 세트와 비타민 음료가 병원 공인 음료라도 되는 양 병원 내 매점 냉장진열대를 모두 차지했다. 어지간한 술집이라면 황도를 안주로 내지 않는다.

황도 통조림과 복숭아 넥타는 그렇게 내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얼마 전, 귀갓길에 들른 슈퍼마켓에서 황도 통조림을 발견했다. 새삼 발견했다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황도 통조림은 손이 잘 닿는 자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여러 회사에서 황도와 백도를 깡통에 담아 내놓고 있었다. 세상에나. 황도는 아직도 사랑받는 게 아닐까? 정말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갑자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믿을 수 없었다. 깡통 황도 따위가 먹고 싶다고? 내가 지금? 나는 깡통 황도를 집어 들고 처참한 심정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봉지를 들고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깡통 황도가 다 먹고 싶고.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지긋지긋한 그리움을 매순간 자각한다

지긋지긋한 당신들을 그리워하기 위해, 백여 미터쯤 떨어진 중앙도서관으로 왔다. 이곳에선 당신들을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그래도 고개를…

인생은 보물찾기

대면수업도 5주차가 지났다. 그사이 강의실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즐거워 보였다. 마스크를 들쳐 턱만 드러낸 채 음료를 마시고 마스크를…

파편, 2019년 04월

20190401 (월) 진짜 신기한 게, 힘이 부칠 때 엄마한테 전화하면 기운이 난다. 엄마는 노상 “요즘 많이 바쁘고 힘들지?”라고…

가을의 고양이와 겨울의 공백

지난 가을, 고양이들이 마당을 떠났다. 나는 자주 계단에 앉아 고양이들을 기다렸다. 무화과 잎이 가지에 상처를 남기며 떨어지고 첫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