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웅의 시집 『거인을 보았다』(창비)를 받았다.
만 이틀 집을 비운 사이 우편함에 두고 간 모양이다. 봉투를 뜯자마자 표지를 슬며시 들춰, 엊그제 한글을 깨우친 사람처럼 면지 위 네 손글씨를 자음 모음 나눠 훑고 다시 꾸려 읽었다. 너는 열띤 어조로 말하며 자주 성질을 내곤 했는데 그 흔적이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그 글은 내게 답을 구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 후회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이런 나도 너도 마음에 든다. 자랑스럽다.
지난 일이지만, 석상리에서 매일 네 방문 걷어차며 “파이! 당장 커피 내와라!” 소리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로즈버드 봉다리 커피 맛없다고 구박해서 미안했다(커피는 테이스터스 초이스지).
첫 시집 무작정 축하한다.
거인을 보았습니다
방 한 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 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가 가면서 처마 끝 거드름을 뜯어가곤 했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 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쓰러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 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튕기며 배고픈 세때를 쫓아 내기도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 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 소리를 뜯어 먹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