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빈 사장님의 부탁으로 가게 메뉴판을 만들었다. 수입맥주의 종류와 가격은 일단 내 멋대로 정했다. 시안을 몇 가지 더 만들었지만 나는 이 얼치기 디자인이 제일 마음에 든다. 비등비등하게 호감 가는 시안도 있었는데 그림의 까다로운 저작권 문제로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 그림은, 빈 맥주병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검은색 아트 펜 한 자루와 흰 종이 한 장과 빈 맥주병 하나가 전부인 세계에 내던져져 오로지 시간을 탕진하려는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것에 홀려서인지 나조차 바에 가서 병맥주를 주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빈 맥주병을 ‘그냥’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빈 맥주병에 얼굴을 비춰보다가 껍데기만 남기고 다른 시간·세계로 떠나는 손님이 점차 늘어난다면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건 이준○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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