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그저 무의미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의미로 전환되지 않는 일상은 폐허와 다르지 않다. 그는 지금 그 의미의 폐허 위에 있다. 나도 그 폐허 위에서 음악을 듣고 청소하고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창작의 진전만이 다시 그 무의미를 의미로 되돌릴 수 있다.
— 김근·남피디,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한 주문 ; 이센스-Writer's Block」, 『드랍 더 비트‪』, 쌤앤파커스, 128쪽.


방학을 일주일 남기고서야 책을 연다. 내가 지은 무의미를 희석해 보려는 안간힘이다. 우선 책 목차에 있는 노래들로 재생 목록을 만든다. 프롤로그를 더듬더듬 읽고, 이후부터는 노래 듣기와 책 읽기를 번갈아 반복한다. 낯선 래퍼의 노래 가사를 새겨들으면서 그간 내 마음이 얼마나 많이 시들해졌는지 알아차린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세계의 어떠한 무례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내가 품는 유일한 불만은 결국 나다. 내 바깥에도 미운 것투성일 텐데 잘 내다보지 못한다. 반면 래퍼들은 그동안 자기를 질시할 기운으로 합이 맞지 않는 세계에 시비를 걸어온 모양이다. 이게 래퍼의 정신건강 비결인가. 오늘은 나도 그 기운을 조금 주운 덕분에 안에서부터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마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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