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초입이다. 참신한 우울도 슬픔도 없으면서 계속 여기다. 어머니는 내가 열차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기 전에 속옷을 벗어 두고 가라 말씀하셨다. 내 부진이 삼재 탓은 아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여전했다. 열차가 연착됐지만, 그것뿐이었다. 내세의 플랫폼까지 나를 싣고 달렸더라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느리게 빠져나오다 묵직한 빗방울에 맞았다. 아야, 하고 혼자 엄살을 부리다가 한 우산을 나누던 이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지워졌다. 이렇게 사소해질 걸 왜 찢어내듯 작별했을까. 모든 일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리고 뜬금없이 저 빗방울처럼 돌바닥에 머리를 찧고 싶었다. 납작 엎드리고 싶었다.
다음 날, 서달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