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안에 깃든 불안에 쉽게 허물어진다.
누군가 선풍기를 켠 채 잠들어 있으면 반드시 꺼야 하고, 불법 정차 중인 자동차를 보조석에서 가만히 앉아 지킬 때도 차주의 전화번호를 미리 눌러놓고 긴장한다. 외출 전에는 전기와 가스, 보일러, 창문을 서너 번씩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서, “껐다”, “잠갔다”, “닫았다”라고 중얼거리며 단속 행위를 몸에 새긴다. 이는 출발하는 버스를 세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멍청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지만)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번거로운 걱정 보따리는 어머니께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가끔 전화를 걸어 아들이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한다. 나는 분명 괴롭지만, 절대 우울하진 않다. 쓸쓸증이나 서글픔증이라면 몰라도.
불안은 글짓기 태도에도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아직도 나는 “아주 적확(的確)하며 조화 있는 단 하나만의 표현”의 가능성을,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와 함께 신뢰한다. 그의 고독한 투쟁을 처음 접하던 날에 난 감동의 눈물마저 흘렸다. 그는 한 편지에서 “표현이 생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휘는 더욱 생각에 밀착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리하여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적었다. 나는 이보다 ‘적확하게’ 글쓰기를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괴롭다. 낱말과 문장에 압도당하면서 간신히 초고 작성을 끝내고 나면 벌써 퇴고할 생각에 식은땀이 난다. 작품을 “어떤 총제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표현과 생각에 경계를 없애는 작업은 내게 불가능하다.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서 원고 뭉치 구석에 “대체 퇴고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셀 수 없이 적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리고 대강 타협점을 찾아 만들어진 원고는 이미 1/3이 버려졌고, 1/3은 다시 쓰였으며, 나머지 1/3은 뼈대만 간신히 남아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도 다르지 않겠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내 문학의 힘은 ‘수치심’이다. 이것은 결핍에서 파생되는 질투심보다 더욱 잔혹한 것이다. 빌어먹을 수치심은 자아의 심판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개인적이고 윤리적이다. 또한 수치심의 생산라인에서 나로부터 생산된 불량률 0%의 완제품 분노는 (다시 나를 공격하기 위한) 절대적인 분노다. 즉, 나는 늘 부끄럽기 때문에 분노하고, 늘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 문장 한 문장에 분노를 쏟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지쳐있다. 간단한 일기를 쓰기 위해서 평균 이틀을 묵혀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읽는 일은 내가 생각해도 속 터진다. 게다가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나와 심판 자아/흐릿한 타자 사이의 불균형은 가혹한 저주에 가깝다. 이것도 모두 어머니께 물려받은 걸까. 단지 원망의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닐까.
수치심과 불안은 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모든 폴더의 이름이 네 글자로 맞춰져 있다거나, 재떨이에 버려진 꽁초들이 완벽한 오열을 유지하는 것, 하나의 문단이 행을 2/3가량 채워야 아름답다는 믿음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이상하고 고상한 고집이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어머니의 우려대로 조만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땐 김윤아 간호사가 “무슨 얘기든 괜찮아요. 오, 제가 다 들어 드리겠어요.”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사랑의 병원”으로 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