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에 하루쯤 흑석동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사람이 무결하게 싫어질 것 같아서. 대략 십 년쯤 전부터 나는 한자리에 머물며 주변을 비우고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그 덕에 공기를 나눠 마시는 진짜 인간은 내 주변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파문을 떨쳐냈을까? 되려 인간혐오가 깊어졌다. 내가 접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방에서 벌거벗고 있는, 모니터 저편의 인간뿐이니까.
나는 숨 쉴 자격이 있는 진짜 인간을 찾아 나서려고 연극 한 편을 골랐다. 그리고 표를 한 장 예매했다. 속마음으로라도 함께 할 사람을 물색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휴대전화 연락처를 들추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수고는 필요 없다. 이따금 생각지 못한 시간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나를 마주친 뒤에 차분히 돌아오면 된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를 공연하는 대학로 ‘유니플렉스’ 3관은 말쑥한 새 건물이었다. 매표소도 합판으로 대충 벽을 세운 성냥갑 매표소가 아닌 본격 유리 매표소였다. 먼저 온 두 여자는 배우의 이름을 대고 초대권을 받았다. 나는 3열 8번 좌석 표를 받았다. 다음 중년 남녀는 부부 같았다. 혼자는 혼자 같았다. 무대 공간은 단출했다. 기다란 나무 상자 하나와 뒷벽의 유리가 전부였다. 무대와 객석 사이는 딱 한 발짝 정도 벌어져 있었다. 객석의 열과 열 사이는 더 좁았다.
암전과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통로 쪽에서 더늘근도둑(전재형役)과 덜늘근도둑(태항호役)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리숙한 도둑질이 시작됐다. 두 늙은 도둑, 전재형과 태항호는 연기를 잘했다. 태항호는 외출 준비를 하며 본 드라마 《미씽 나인》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신기했다. 《미씽 나인》에서 태항호는 ‘레전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황재국의 비서 ‘태호항’을 연기한다. 엉뚱하고 순진한 겁쟁이 캐릭터인데 덜늘근도둑 역할에서 태호항의 모습이 살짝살짝 보였다. 물론 그는 무대의 주인답게 잘 놀았다. 더늘근도둑 역을 맡은 전재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맛깔나는 늙은 도둑이었다.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극이 끝나자마자 그가 몇 년 생인지 검색도 했다(1983년생). 수사관 역의 유일한도 두 늙은 도둑을 잘 지지했다. 무엇보다도 약간 쑥스러운 듯한 연기가 참 좋았다. 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에서 산적으로 출연 중이라니 잘 살펴봐야지. 하여간 배우들은 그 이상이 없을 만큼 각자 배역으로 100분을 살았다. 어디까지 설정이고 어디까지가 즉흥연기인지 도무지 알아챌 수 없었다. 관객은 모두 행복했다. 옆자리의 두 여자도 행복했다. 그 두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는 게 너무 좋아서 나도 행복했다.
연극 구성은 1989년 초연 작품(이상우 작·연출)과 마찬가지로 풍자 코미디의 형식을 유지했다. 이명박, 박근혜, 최순실, 황교안, 우병우, 문재인 등이 언급되었고, 사대강, 국정원 댓글, 도로명 주소, 이태원 살인사건, 청년 실업, 헬조선, 기업총수의 검찰출두 휠체어 투혼 등 온갖 세태를 다뤘다. 정상인이라면 뒤끝 없이 웃을만한 내용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삼성 깃발을 함께 들고 광화문에 나간 적이 있다면 다른 연극을 권한다.
(+)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의 배역은 더늘근도둑(전재형役), 덜늘근도둑(태항호役), 수사관(유일한役)이 맡았다. 다른 날에는 더늘근도둑(노진원·성열석役), 덜늘근도둑(박철민·정경호·안세호役), 수사관(민성욱·이호연·나대남役)이 출연한다. 정경호가 연기하는 덜늘근도둑과 민성욱이 연기하는 수사관도 궁금하더라.
(+) 길거리에서 쏘란빵과 야채호떡을 사먹었다. 쏘란빵은 쏘세시를 얹은 계란빵으로 무려 1,500원이나 했다. 이름만 요란하지 별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야채호떡은 잡채호떡에 가까웠다. 1,000원짜리치고 괜찮았다. 좀 느끼했지만.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부근의 ‘포켓스톱’을 한 시간 가까이 돌고돌았다. 지난번보다 포켓몬 트레이너가 훌쩍 적어진 것 같았다. 나는 새로운 포켓몬을 다섯 마리나 잡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