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라, 뜨거워라, 청춘
린다린다린다 (リンダリンダリンダ, Linda Linda Linda, 2005)
야마시타 노부히로(山下敦弘) 감독, 배두나(보컬 송), 카시이 유우(키보드 케이), 코모토 마사히로(코야마), 마에다 아키(드러머 쿄코), 미무라 타카요(린코), 세키네 시오리(베시스트 노조미), 유카와 시오네(모에) 출연.
청춘은 얼마나 허약하게 식어버리나.
MTV처럼 시종 시끌시끌하다가 파악 하고 전원이 나가버리는, 매운 겨자처럼 아릿하게 인생을 긁고 지나가는, 트램펄린(일명 ‘방방’)에 올라탄 듯 기쁨과 절망의 꼭짓점 사이를 가장 빨리 오고 가는, ‘너’라는 동기를 갖기 위해서 몇 해를 뒤척거리는, 그 측은한 청춘. 그래서 우리 청춘은 이미 식어버렸음에도 ‘어른의 원석’처럼 얼마나 반짝거리나.
청춘은 언제나 뒤에 남겨두고 오는 것이다. 분만실에서 어머니의 골반이 개봉되는 순간 열 달을, 돌잔치 날에 연필이나 실 대신 아버지의 멱살을 잡으면서 일 년을, 입학부터 졸업까지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청춘을 정산한다. 내가 아는 한, 수지맞는 청춘은 없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다고 김국환처럼 기뻐하기엔 슬퍼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나이에 맞게 몸을 불리는 동안 팽창하는 감정과 통증을 견뎌내는 동시에 애써 낳은 죄로 멱살 잡힌 부모님의 뒷돈과 자신의 꿈을 걸고 낮밤 없이 슬롯머신 레버를 당겨야 한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 풍경과 돌아갈 차비도 없는 좌절이 너무나 친밀한, 그것이 청춘이리라. 그럼에도 청춘은 정말 눈부신 걸까? 감히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청춘이 긴 꼬리를 잘라놓고 유유히 사라진 지금은 그 시절보다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아무리 비싼 요금을 지불하더라도 어떤 투쟁을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일탈과 비행에 쉽게 매혹되는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군림했던 ㄱ씨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이 아빠가 됐다. 그는 청춘의 한 면에 매우 충실했지만 그 때문에 가장 먼저 어른이 되고 말았다. 나도 고등학교 1학년 때 결행한 가출에 성공(?)했더라면, 어느 시내 외곽의 사글셋방에서 고단히 누워 있을 것이다. 그 곁엔 S가 있거나 곰팡이 핀 안주와 술병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춘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도 안에서 달콤한 시간을 즐기며 조심스럽게 한 발 한발 나아가는 것뿐이다. 제도는 청춘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불쑥 커버리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물론 청춘을 지속하기 위해서 뜨거움을 꺼뜨리는 일은 서럽다. 누군가는 『수학의 정석 II』를 씹어 삼키면서 오열을 터뜨린 뒤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렇게 중얼거릴지 모른다.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때, 그것이 어른이 되는 거라고 누구도 말 못 하게 하겠어. 우리가 어른이 될 때, 그건 어린아이를 그만두는 게 아니야. 진정한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건가. 진정한 우리는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진정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건 앞으로 잠시뿐.”
영화 속 소녀의 긴 대사는 청춘의 자기 고백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山下敦弘) 감독은 담대하게,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토로하면서 소녀들을 관찰한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지만 애초부터 그는 작품 속의 여러 가지 소품과 조연으로 깃들어 지나간 청춘을 다시 즐기고 있다(조연 가운데 어눌한 선생님은 확실히 그가 아닐까). 시종 차분한 영상의 끝엔 청춘의 다른 뜨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영화들이 폭력과 저항 속에서 10대들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영화 《린다린다린다》는 조용한 일상과 사실적인 록밴드를 통해 따듯함과 뜨거움을 함께 발견한다. 영화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This Is The Beginning Of Love, 1990)에서 최 선생님(최재성)도 “너희들에게 필요한 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자칫 촌스러워지기 쉬운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양념으로 청춘 그대로의 빛을 낸다. 그 가운데 유학생 송(배두나)은 확실히 탁월한 설정이다(우리에겐 좋은 배우가 있구나). 송의 주변에서 전개되는 고백 장면과 종종 솔직하게 털어내는 한국어는 멋쩍은 관계를 훌륭하게 메워주고 있다. 또 일상을 찢고 나온 다른 연기자들의 자연스러움은 발군이다.
극 중 유학생 ‘송’이 ‘블루하츠(ブル-ハ-ツ)’라고 읽고 ‘파란 마음’이라고 적은 밴드의 노래 ‘린다린다린다(リンダリンダリンダ)’는 청춘의 소망을 대변한다. 이 노래 속 가사 “시궁창의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사진에는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라는 구절보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싶다. 청춘에는 특별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심심한 줄거리를 가진 내 청춘에도 알츠하이머에 걸려 잊어버리면 큰일인 아름다움이 수만 가지쯤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 소녀와 일본인 소녀들의 일상에 존재하는, 국경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구획되지 않은 청춘은 더없이 아름답다. 모든 경계는 청춘을 구속할 뿐이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부터 총을 들고 달아나던 난민 아이들에게도 경계 바깥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세상의 모든 청춘이 사랑만 했으면 좋겠다. 감독도 내 생각과 같은 모양이다. 현실의 밝은 부분만을 응시하는 감독의 지나친 순수함이 내겐 그대로 좋다. 사랑으로 마음을 졸이고, 네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유를 만들고, 한두 가지쯤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적당히 다른 것을 포기하는 아름다움. 그 외에 어두운 부분은, 청춘의 무거움은, 가끔 다른 것에 맡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청춘은 다시 말한다.
“우리들은 이걸로 끝이 아니야.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들은 고교 시절을 추억으로만 남게 하진 않을 거야. 지금 불고 있는 바람과 내일 부는 바람은 똑같은 것일까? 의지와 용기는 같은 주머니에 넣어두자. 여기는 우리들의 왕국.”
덧붙임. 아직 어린아이를 그만두지 못한 ㅁ씨는 《반올림》 OST를 들으면서 이 글을 썼다. 나는 너의 청춘을 응원한다. 무엇으로도 재단되지 않는 너희들의 청춘이 아름답다. 나도 한때 그런 청춘을 가져 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