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무엇이 내 감정을 옮겨놓았을까.
문밖에서 한참 울다가 돌아가던 A로부터, 우리 790일을 고행으로 명명하고 떠난 B로부터, K대학까지 등졌던 C로부터, 내 감정에서 용기를 도려낸 것은 무엇일까. 그 뒤로 나는 비겁하게 달아나기만 한다. 어차피 감정은 이해의 영역에 놓여 있지 않다. 짝꿍의 감정은 고사하고 자신의 감정조차. 그러니 객관적인 단서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타인의 감정을 제삼자가 가늠할 도리는 없다.
그들에게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적 정황이 가득하고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와 같은 잠언이 온 마음에 새겨져 있더라도 타인을 향해 충만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주지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기준에 얼마나 충족하는가를 알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예쁘다와 착하다와 같은. 그런데 정말 예쁘다고? 더 예쁜 여자들이 저렇게 많은데 왜. 착해? 뭐가 어떻게 다른 착함인데?
타인에 대한 몰공감은 정서적 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감정의 방탄(防彈)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극으로부터 사람이 돌연 미치는 일을 방지한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몰공감과 몰이해 속에서도 둘이 하나 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구축한 연인은 결혼을 한다. 이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물음을 포기한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사랑 또는 사랑에 버금가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둘만의 울타리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녀(그)와 평생을 함께 보내겠다는 결의는 어떤 모양인가요? 결혼을 결심할 만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요. 모르겠다. 나는 새벽에 메이크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신랑신부의 뒤를 밟아 대기실 문을 걸어 잠그고 위협하듯 묻고 싶다. 인생이 들썩거릴 만한 결심의 배후(背後)에 무엇이 있느냐고. 도대체 형수의 무엇이 혼자를 견딜 수 없게 하느냐고.
이것도 축사(祝辭)라고 해두자.
드디어 내일(2006년 6월 24일 토요일)이구나. 해마다 장마철 일기예보가 들리면 결혼기념일 축하 전화를 넣어야 할지 고민이 될 것 같다. 부디 아주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시기를. 행복에도 자신 있는 사람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지.
정말 오래간만에 “나는 아무 데도 살지 않는 愛人이 보고 싶”(이성복, 「성탄절」,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99)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