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20120513 (일)

한낮에 꿈을 꿨다. 당신이 내 친구를 초대해서 식탁에 앉혀두고 크림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 능숙한 솜씨였다. 나는 그 모습을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다가 서글퍼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120513 (일)

요즘은 영화 《러브픽션》 사운드트랙 중에서 <방울토마토>와 <알라스카>를 들으면서 등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주 오는 사람들과 팔을 번쩍 들어 인사하고 싶다. 겨드랑이가 보이도록. 하지만 나는 항상, 혼자일 때 가장 외롭지 않다. 오늘도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당신도 나만큼 힘들다. 이 당연한 사실을 매일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도 영 믿기지도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20120513 (일)

비가 온다. 어딘가에 혼자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20120514 (월)

좁은 골목길 담장과 담장에 부딪혀 메아리로 울려 닿는 택배기사님의 호명은 왜 항상 내 이름인가. 누가 내 문 앞에 두고갈 것이라곤 ‘좇’도 없는데.


20120514 (월)

아픈 아버지께 전도하기 바쁜 자식놈도 뇌에 무슨 큰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20120514 (월)

기나긴 투쟁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판가름나는 것은 결국 누가 먼저 지겨워하느냐에 달렸다. 나는 애초부터 사는 일이 지겹다고 늘 생각해 왔다.


20120514 (월)

불과 40분 전에 캐빈에서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얼굴은 냉랭해졌고 등과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르다가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앞이 새카매지면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신꼬마와 주변에 있던 한 남자가 달려와 부축을 했고 사장님께서도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다. 하지만 누가 먼저였는가는 볼 수 없었다. 한동안 낮은 의자에 앉아 쉰 덕에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앞날은 여전히 어두웠다. 뭔가 잘못됐다.


20120515 (화)

담배를 끊을 생각을 하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이 현명하지 못한 흡연을 한 달 하고도 보름동안 계속하고 있다. 45일 전, 진료실에서 나가려는 내게 의사는 말했다. “오늘부터 담배 끊으실 거죠?” 나는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까 한 대 피우려고요.” 의사는 기가 차다는 듯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젠 정말 그만 피워야 할 것 같다. 다시 무너지면 눈을 못 뜰지도 모른다.


20120515 (화)

스승의 날이다. 내 지도 교수님을 모신 소박한 스승의 날 행사가 두 시에 시작된다. 나는 (수강생 몇몇이 준비한) 행사를 피하기로 했다. 그리고 학과 교수님과 은사님께도 연락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의 사제관계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나는 발가벗은 존경심을 은밀히 품을 것이다.


20120515 (화)

머리카락을 자르러 왔다. 부원장님은 월차 중이다. 머리를 감겨주는 동안 떠오른 건데,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기록 삼아 재미 삼아 찍을 수 있는 스티커 사진기가 한 대 있으면 좋겠다. 다음번엔 꼭 염색을 해야지.


20120515 (화)

내가 언제나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당신의 결정은, 내 곁을 떠나겠다는 것뿐이다.


20120515일 (화)

내 바나나셔틀 김이 바나바나나를 열람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갔다. 소란스럽게. 바나나셔틀 김아, 다음부터는 좀 조용히 주렴. 내가 창피하지 않게.


20120515 (화)

너는 그리움 안에 있을 때만 좋은 사람이다. 너를 그리워하기 위해서 너를 안 보겠다.


20120518 (금)

방화범 홍과 한방 삼계탕 한 그릇 뚝딱 먹고 수박바 빨며 대학원 열람실에 올라왔다.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는, 빛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몸 터는 나뭇잎을 한동안 바라봤다. 나와 나뭇잎 사이로 사람들이 휘청휘청 지나갔다. 빛과 나뭇잎과 사람들과 나, 그리고 방화범 홍. 반드시 그리워질 날이 오라는 예감이 들었다.


20120522 (화)

낮에 현빈이 다녀갔다고 한다. 나 역시 부근에 있었지만 직접 본 거라고는 현빈을 기다리는 사람과 덩달아 모여든 사람 뿐이다. 사람들은 현빈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 같다.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무리 틈에 좁은 길을 내며 집으로 향했다. 사실, 실재하지 않는 건 현빈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대부분 볼 수 없다.


20120522 (화)

당신이 왜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하는 밤이다. 깊이 생각할 게 없는 밤이기도 하다. 겹으로 겹으로 포개진 밤의 층계를 딛고 딛고 딛.


20120522 (화)

내가 담뱃재를 털 때마다 고요 속에 잠겨있던 어둠이 가벼운 화상을 입고 뒤로 잠깐 물러난다.


20120523 (수)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나로 인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20120523 (수)

너의 슬픔으로 내가 탈이 날 수도 있구나. 티슈 한 장 건네기까지 이야기는 너무 풍성해 다 거둘 수 없다. 배회하며 울고 싶다.


20120524 (목)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을 정지했고 카카오톡과 마이피플과 라인 어플을 삭제했다. 마음이 돌멩이보다 단단해지면 아예 휴대전화기를 정지할 생각이다. 호주머니만큼 불룩하던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지면 좋겠다. 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마음 문드러지게 하는 일이 있을까. 오지 않을 것들, 어쩌면 부고로 올 것들.


20120524 (목)

나를 상심케 하는, 웃음소리.


20120525 (금)

f(x)가 다녀갔다. 구경하는 내내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내가 시간의 숲에서 잃어버린 것이 저 아래에 있다. 하지만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20120526 (토)

내가 너에게 바라는 모든 것은 죄가 될 것이다.


20120527 (일)

바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 빗방울이 맥 없이 떨어진다. 비에 맞아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지만 오늘 저 비를 맞으며 바람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밤새 앓다 죽을 것만 같다. 나부끼는 것이 지금 서서히 죽어간다.


20120527 (일)

언제 닿는 걸까. 언제 만질 수 있는 걸까. 내가 공포에 무너져 눈을 뜨기 전에 머리가 먼저 으깨지길 바래.


20120528 (월)

여름이 기억난다.


20120528 (월)

곤란 속에 내버려진 이 골목에도 부처님은 오셨나요.


20120528 (월)

콘이 쓰러져 있다. 콘의 두 윗변 각과 길의 경사가 맞닿아 수평을 이뤘다. 내가 이 낮은 곳에서 쓰러지고 내게 걸려 네가 넘어지고 그 위로 사소한 추억이 두텁게 내려앉으면 우린 나란히 얼굴 맞댄 채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겠지.


20120529 (화)

에코 모가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손가락의 모든 첫 번째 마디를 자르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봤을 땐 이미 열 손가락 대부분을 잘라버린 뒤였다. 나는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손가락들의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나는 에코 모를 말리면서 손가락을 왜 자르는 거냐고 물었는데, 에코 모는 그들이 손가락을 자르게 할 순 없다고 말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에코 모가 말하는 ‘그들’이 누군지 (당시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코 모가 손가락의 남은 첫 번째 마디를 마저 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120529 (화)

샤워를 오래 한다. 작업이 막혔다. 눈송이 하나가 내 눈 높이에 멈춰 서서 물었다. 제가 왜 허공에 매달려있는지 아시나요? 낙하하는 의미를 알기 전엔 전부 유보할 수밖에 없어요. 눈송이가 눈송이이길 거부하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이 세계에서 무의미한 것은 무의미를 의미해야할 때만 존재할 수 있어요.


20120529 (화)

이어폰(SONY MDR-ED12LP)을 잃어버렸다. 일명 방독면 이어폰이라고 불리는 제품인데, 이 제품군을 약 십칠 년쯤 전부터 사용해왔다. 심지어 파나소닉 카세트플레이어를 사면서 천안 지하상가 점원에게 소니 카세트플레이어의 번들 이어폰으로 바꿔달라는 부탁도 여러 번 해봤다. 하여간 값싸지만 정말 좋아하는 이어폰이었는데 잃어버려서 서운하다. 똑같은 이어폰을 다시 사려고 검색해보니 값이 제법 올랐다. 그래봐야 이만 원대 초반이지만 선뜻 주문하기 버튼을 못 누르고 있다. 기왕 새로 사는 거 유어비츠 이어폰을 사버릴까도 싶다. 그 외에도 몇 종의 이어폰을 내 마음 깊은 곳의 장바구니에 살포시 담아뒀다. 한동안 이어폰을 고르느라 다른 일을 못하겠구나. 아, 괴로운 소비!


20120529 (화)

쉐이빙 젤로 이를 닦았다니.


20120529 (화)

급작스런 우울의 증발은 더 위험하다. 머리 위로 우울이 언제 다시 쏟아질 지 모르는 불안마저 짊어진, 이 부서지기 쉬운 몸을 내일도 문 밖으로 내던져야 한다니!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무관심 뿐이다. 이 유용한 앎을 깨달은 후론, 미끈한 당신을 마주하고도 구애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 손 잡고 깍지를 끼면 다섯 개의 우울이 찾아올 것이고 입을 맞추면 마흔 두 개의 절망이 깃들 것이므로.


20120531 (목)

남루한 모습으로 당신을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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