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8월이 사람들의 미움을 짊어지고 다음 해로 떠나던 날 새벽, 멜랑꼴리한 문자메시지 한 통이 가을바람을 묻힌 채 찾아왔다.

― “가끔 고민해 정리벽이랄까 저장된 번호들을 보면서 이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나 같은 것들”

아득히 먼 마을에서 단문 메시지 80바이트를 꾹꾹 채워 발송한 신호는 너라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이 더 이상 우리가 아님을 애도하고 동시에 지금 내 관계를 몽땅 되감아 보도록 지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나는 ㅊ에게 위안이 될 만한 혼잣말을 보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내가 정리되었을까?). 궁색한 생활을 조금 감추며 변명을 남겨두자면, ‘어떤 이유’로 그날 매우 바빴고, 나는 이미 저장된 이에 대해 삭제와 같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우리는 정말 우리일까?”라는 의심은 식욕만큼이나 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당신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나는 너를 정리하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가혹하지만 일종의 징벌로서 고백한다), 너를 정리하기 위해서 너의 번호를 정리하지 못한다. 네가 불현듯 다시 전화를 걸어오지 않을까 불안해서, 네가 너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들뜬 기분으로 반기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서, 그것을 시작으로 완벽히 무너지는 게 두려워서.

이제는 낯설어진 너의 이름이 휴대전화기를 흔들어 가을밤 귀뚜라미를 놀래킨다면, 난 조심스럽게 종료 버튼을 누를 생각이다. 아주 확실한 땅 투자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다. 연락처의 247명 중 이렇게 슬픈 위치로 저장된 사람은 너 하나다. 너의 잘못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다.

너는 한때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그 이상 애틋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중대한 시점에 할퀴며 돌아서 버린 사람이다. 동시에 나로 하여금 큰 죄를 짓게 만든 사람이다(나의 죄책감은 너를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난 너를 절대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다. 절멸한 적 없는, 절멸되지 않는, 그래서 진화밖에 남지 않은 감정이 너라는 대상을 초월하여 어느 만큼의 강함과 잔혹함을 온몸에 두를 수 있는지 이해한다면 날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때 우리였을 때 만든 초원이 단숨에 사막이 되어 그곳을 영원히 혼자 횡단해야 하는 나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결코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너의 번호를 지우지 않는다. 너와 나의 ‘애틋’을 애도하며 거기 그냥 둔다. 모든 게 달라졌지만 ‘지난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초원과 사막이 원래 하나였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추가. 이 밤에 “안녕 난 247명 중의 하나인 ㅊ씨야ㅡ_ㅡ”라는 문자가 왔다. ‘설마 이 글을 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날라리 똥개 영철이

“(…) 날라리 똥개 같네.” 영철이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 공부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고, 그리고 비겁한 놈이었다. 따라서 그런…

요조를 만났다

대학 시절의 기억은 자취방으로 시작해서 자취방으로 끝난다. 한 번쯤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당시 기숙사에 기거하는 남학생들은 여자기숙사…

나의 병상 곁에는

영화 《목숨(The Hospice)》을 봤다. 상영 시간 내내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병상에 눕히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도 거기…

비물질적 육체

하얀 무릎 개강까지 아직 날이 남아있지만 회의 및 워크숍 일정이 잡혔다. 싫어도 안성행 버스를 다시 타야 한다. 어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