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Mii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에 이렇게 썼다. — “미래는 또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갔다.”(39쪽)
어느 보랏빛 새벽에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문장을 읽고 속이 상했다. 내가 먼저 오늘을 삼인칭 시점으로 이렇게 기술했어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내 미래는 “하나의 신비”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설렘이 마지막으로 온몸에 충만했던 날을 떠올려본다. 영혼이 불규칙한 파형(波形)으로 흔들리고 신체 기관이 동조하여 첫 설렘을 재현했던, 그것이 일상을 충만히 감염시킨 마지막 날은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비관적 신비를 위해서 뼈와 살과 근육을 기꺼이 마모시켜 온 사람의 얼굴은 또렷하다. 환갑이 지난 아버지는 앞으로도 자기 생을 허비면서 내 작은 일에 기뻐할 것이다. 어머니는 저린 몸을 때리며 잠 깨는 새벽에도 아들의 김치나 쌀이 넉넉한지 걱정하며 수화기를 들 것이다.
그 덕일까, 내 보잘것없는 미래도 오래간만에 “또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작은 비밀’이 거들어 이루어진 가능성이다. 달콤하다. 하지만 이런 매혹의 뒤편에는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도 신비의 일부분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이 무엇을 해하기 위해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기 인생을 위태로운 신비에 의탁하는 것은 무모한 삶의 방식이다. 인류의 숙원이었던 정주(定住)나 안정과는 지구의 양극점 만큼 동떨어져 있겠지만 내게는 아직 ‘신비’가 인생을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는 탁월한 방식으로 비친다. 그래서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불확실의 불확실로 나아가기로 했다.
요즘 이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전셋값이 계속 오르고 있어서 큰일이다. 새집은 외풍과 바퀴벌레가 없는 아늑한 곳이면 좋겠다. 욕심을 조금만 더 부리자면 가까이에 산책로와 도서관이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만사 제쳐두고 이사를 돕고 싶은 사람은 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