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일을 맞은 134,980명(대한민국 인구/365일)에게 다소 미안한 고백이지만, 나는 다세대 주택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맞춰 킥킥킥킥 웃고 있다. 올해 11월 27일(월요일)은 구겨진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장례식장에 앉아 육개장을 떠먹는 게 어울릴 만큼 서늘하고 서러운 날씨구나. 자신의 탄생을 축복하는 사람들과 어수선한 파티를 계획한 생일자를 위해 진심 어린 동정을 할 수 있다는 건 (혹은 부러움과 질투를 감출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게도 내가 아직 단단하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그래서 상심한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옛날에 “인생 최고의 비극은 자기가 끓인 미역국이 제일 맛있을 때 온다”라고 말했던 지혜로운 동시에 요리 솜씨가 빼어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생일에 비가 내리면 누군가는 반성과 사과를 해야 한다”라는 말도 중얼거렸다. 이런 음울한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면, 그래, 내가 막 지어낸 거다. 이 경솔한 말은 우리에게 기회가 한 번 더 남아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의 문화는 양력과 음력 생일 간에 상호 보완이 가능하지 않나.
생일이라는 게 과연 축하받을 일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생일 축하를 받는 일 자체가 내겐 너무 부끄럽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한 여자아이(이름이 뭐였더라)가 제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를 불러냈다. 월넛색 MDF 테이블 위에는 직원까지 나눠 먹어도 남을 만한 크기의 화려한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직원에게 여분의 접시를 부탁하고 색색 초에 불을 붙이는 동안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이 상황이 이상하게 부끄럽고 창피했다. 눈 앞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빨간색 촛농이 되어 케이크의 크림 속으로 얼굴을 묻고 싶었다. 축하를 마땅히 여기고 마냥 기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축하에 인색한 가정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어머니는 매해 생일마다 책을 한 권씩 사주셨다. 평소에도 책에 대해서만큼은 인색하지 않았지만, 간혹 한 번 더 읽으라거나 이웃집에서 책을 얻어다 주기도 하셨다(초등학생에게 『문예중앙』을 읽으라니요). 아주 오래 전통처럼 이어진 책 선물은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지금쯤은 책이 아니라 과학 상자를 선물하지 않은 것을 상심하고 계실 부모님께 위로의 말을 드리고 싶다.
이 이야기에 특별한 결론이나 주제는 없다. 앞으로도 나는 50번쯤은 더 생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어수선하게 글을 맺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