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나는 더없이 좋아한다, 인적이 드문 도심 외곽의 작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이 어둠으로 조심스럽게 스미다 기어이 점령한 하늘을 털어내 눈 쏟아지게끔 했던 그 어떤 날을, 새벽에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미안하다, 미안하다” 중얼거리며 새하얀 눈 위에 심술 어린 발자국을 찍고 있을 때 어느 틈에 곁으로 다가와 목덜미로 눈덩이를 집어넣던 누군가를. 나는 더 없이 사랑한다, 등 뒤에서 차가운 눈을 몰래 뭉쳐 쥐는 장난꾸러기의 마음과, 내 곁에 있거나 있어 줄 누군가를.

동시에 떠올린다, 목덜미에서 온몸의 세포를 일으켜 세우던 눈덩이의 차가움을, 촛불의 어스름한 빛 너머에서 무방비로 서로를 마주 보았던 너와 너와 너를. 나는 또 생각한다, 네 차가운 손이 망설임 없이 포개오던 때 들려왔던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느 한때를 그리워한다, 너를 중심으로 모두 촘촘하게 완성되었던 오래전 겨울을, 그 캐럴을. 그리고 나는 동정한다, 짝사랑의 입술 사이로 드러난 환한 이가 세상을 밝힌 날에도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서 던전 안으로 쓸쓸히 걸어 들어가는 누군가를, 피자를 먹고 남은 피클에 밥알을 씹어 넘길 나를. 나는 슬퍼한다, 희망이 없는 내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어제 낮에는 임신한 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용무 ①, 친구의 결혼식이 내일모레 사당에서 있는데 동행하여 뷔페를 먹자. 누이는 홑몸이 아니니 종복(從僕)이 꼭 필요하다. 용무 ②,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월간이니 캐럴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장 다운로드 할 만한 곳을 고해라. 단,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오지 않는다면 스너프 필름(Snuff Film)의 주인공이 되어 영원히 P2P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 나는 9일 예식 만찬에 대해선 시큰둥, 캐럴에 대해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뷔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고작 김밥으로 교통비나 뽑을테고, 어깨춤 캐럴은 당최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설마 <마빡이 겨울 이야기 위드 크리스마스 캐럴>을 원하는 걸까? 귀의 고난을 이겨내고 열심히 듣다 보면 먼저 구원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누이를 비롯해 크리스마스 캐럴이 필요한 손님들에게 앨범 몇 장 추천합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내킬 때마다 앨범을 추가하겠습니다. “인적이 드문 도심 외곽의 작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이 어둠으로 조심스럽게 스미다 기어이 점령한 하늘을 털어내 눈 쏟아지게끔 했던 그 어떤 날”이 여러분에게도 모습을 드러내길.

1. Vince Guaraldi, <A Charlie Brown Christmas>, 1965.

2. South Park, <Mr. Hankeys Christmas Classics>, 1999.

3. Stevie Wonder, <Someday at Christmas>, 1967.

4. Eddie Higgins Trio, <Christmas Song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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