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재즈, 신의 악기 박물관

스터즈 터클,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이매진, 2006.



“존 콜트레인은 멋진 친구였다.”(274쪽)

나는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말을 기억을 들추듯 한 음절씩 신중하게 발음하면서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음반 『Blue Train』을 꺼냈다. 앨범 표면에 먼지가 엷게 앉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우주적 질서”를 색소폰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영혼을 연소(燃燒)하고 있었다. 나는 새벽빛 그 서늘한 기운에 앙당그러졌다. 그리고 감정이 응고된 유령 같은, 불멸을 약속받은 제왕의 축젯날에 들릴 법한 소리가 내 암암한 날을 끄집어냈다. 존 콜트레인과 위대한 만남의 날을.

어느 골목길에 <실뱀>이란 레코드점이 있었다. 이곳에는 혀와 피부로 소리를 흡수한다는 실뱀들이 모여들어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을 닮은 사장님과 재즈를 완성해 나갔다. 나는 실뱀이 알토 색소폰으로 진화해 나가는 그림이 여럿 그려져 있던 구석에 서서 창백한 얼굴로 그들을 동경했다. 그걸 본 사장님은 내게 “격정을 이해할 나이니 저기 『Blue Train』 앨범을 가져가서 입으로 소리 낼 수 있을 때까지 들어 봐.”라고 말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비닐을 뜯고 플레이어에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새로운 ‘실뱀’을 환영하듯 미소 지으며 첫 번째 트랙을 재생해 주었다.

나는 출입문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쪼그려 앉았다. 존 콜트레인은 시멘트 담벼락을 툭 무너뜨리고, 나와 재즈 단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마음껏 스윙할 수 있는 캄캄한 우주를 보여줬다. 내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천왕성 적도 면의 고리가 되었고, 앨범 재킷에 있던 존 콜트레인은 영하 200℃의 푸른 행성이 되어 서서히 공전했다. 정말 죽이는 아름다움. ― 그는 분명 ‘신의 악기’였다. 나는 다른 표현을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며칠 동안 젖몸살을 앓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2번 트랙 <Moment’s Notice>를 따라 입으로 소리 내는 데까지 수 주일이 걸렸다. 그러나 다시 찾아간 ‘실뱀’은 이미 문을 닫고 없었다. 그 후부터 클리포드 브라운의 트럼펫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인생을 살짝 옮겨놓고 금방 증발해 버린 ‘무엇’을 상상한다. 내 영혼의 각질이 한 겹 벗겨졌던 날을 떠올리며.


책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늦은 시간에 찾아와 옷자락을 잡아끈다. 저자 ‘스터즈 터클’은 나를 ‘실뱀’의 시간으로 부활시킨 것과 같이, 음을 정확하게 짚으며 몰아치는 존 콜트레인의 영혼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것과 같이, 독자를 재즈의 전설 속으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전설 속의 인물들 ― 조 올리버(Joe Oliver),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Benny Goodman),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등 13인의 ‘신의 악기’들은 자신의 삶을 “재즈의 역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고리들”이었다고 고백했다. 신탁(神託)이 아니었다면, 소년원에서 갓 출소한 루이 암스트롱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석탄 수레를 끌다가 늦은 시간 술집 ‘폰스(Ponce’s)’에 들러 코넷을 불 까닭이 없었다.

그럼, 수많은 천재를 매혹시켜 새로운 음악을 위한 고리로 만들어버린 ‘재즈’란 무엇일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재즈는 개별 뮤지션들이 가진 경험의 총체이자 모든 뮤지션들이 지나온 경험의 종합”(282쪽)이다. 여기서 그간 수많은 이론 서적을 읽었음에도 재즈의 광활한 우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밝혀진다. 우리는 자학과 절망 대신 재즈의 혁신을 위해 죽어간 그들을 먼저 살펴야 했다. 그리고 끝없는 열망의 허기를 기억함으로써 연대와 우정을 돈독히 쌓아야만 했다. 그땐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재즈가 꿈만은 아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베시 스미스의 <Down Hearted Blues>를 재생한다. 잠시 후 찬바람이 깨우고 지나간 내 몸을 조용히 끌어안는다. 거친 모래를 머금은 목소리가 값싼 스피커와 잘 어울린다, 라고 생각하며 한 가지 소망을 품는다. 그녀의 노래가 어두운 골목길에 스며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속 마개를 슬그머니 열어주길.


‘신의 악기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팁 한 가지. ― “새로운 소리는 언제나 상상이 가능하다. 새로운 느낌에도 언제든 다가갈 수 있다. 더불어 그런 느낌과 소리를 끊임없이 정화(淨化)해 나가야 한다. (…) 그래야만 듣는 이들에게 최상의 것, 즉 본질을 전달해 줄 수가 있다.”(274쪽) ― 존 콜트레인의 이 말은 모든 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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