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쌍쌍파티

두 개의 안장. 두 개의 핸들. 두 쌍의 페달. 이런 흉측한 물건을 타고 나다니는 사람이 현대에도 있다. 커플 자전거라나. 아무리 좋게 이해해 보려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모양새는 그럭저럭 참아준다지만 앞에 앉는 사람은 뒤에 앉은 사람이 동일한 노동력을 투자할 거라고 믿고 있을까. 그래도 당신이 반드시 나와 함께 타고 싶다고 말한다면, 내가 뒤에 탈거다. 길옆 가로등을 모두 밝힐 만큼 페달이 힘차게 돌면, 당신의 허벅지엔 근육 다발이 선명하게 일어설 것이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면 감수해야지. 그리고 진심으로 경탄할 거다. 하지만 고개를 떳떳하게 들 자신은 없다. 당신이 창피한 건 아니야.

 

대견하다

‘대우 공기 방울 세탁기’가 고장 난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남아 있는 깨끗한 셔츠는 단 한 장. 그나마도 단추가 떨어진 셔츠다. 나는 실과 바늘을 찾아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없다. 아무 데도 없다. 한참 뒤에야 손가락을 따느라 소독했던 것인지, 끄트머리가 까맣게 그을린 바늘 하나를 찾았을 뿐이다. 이번에는 실이 없다. 절망에 젖은 나는 어째서 미리 누에를 치지 않았던가, 후회했다. 당장이라도 다른 옷의 올을 풀까? 집 앞 세탁소로 달려갈까? 다른 단추마저 뜯어버릴까? 가장 덜 더러운 옷을 입을까? 외출을 하지 말까? …실이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암울했다. 나는 고향집에 굴러다니는 실몽당이를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만족할 만한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집을 나왔다. 내가 택한 방법은? 인체에 진짜 유해한 농약이 잔뜩 검출된 ‘녹차 티백’의 실을 풀어 단추를 달았다. 생각보다 넉넉한 길이였다. 참고로 <동서 현미녹차>보다 <태평양 설록차>의 실이 더 길다.

 

서비스센터

대우 공기 방울 세탁기를 고쳤다. 수리비로 1만 6천 원(출장비 포함)을 청구한 수리기사님은 ‘임시로 거시기를 했다’고 말했다. 이런 말씀도 덧붙였다. “조작 기판에 이상이 생겼어요. 교체하려면 10만 원이 넘어요. 만약 다시 고장이 나면 그냥 새로 사세요.”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새 제품의 가격보다 부품 교체비가 더 비싼, 이 이상한 일을 우리는 (별 의심 없이) 납득한다. 새 제품을 한 대 더 팔겠다는 제조사의 입장을 소비자가 기분 좋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이 출장 수리기사님의 고객서비스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소비자(나를 비롯해)가 매우 감사한다.

 

이 선생님

이 선생님은 시설이 아주 좋은 노래방에서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부르셨다. 내가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그리고 정태춘·박은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고등학생 시절, 문예회관에서 정태춘이 사인해 준 음반은 고향집에 고이 모셔져 있고, 그가 쓴 책도 두 권이나 가지고 있다. 대학 신입생 환영 자리에서도 정태춘의 노래를 불렀다(가사가 기억나는 노래가 진짜 그것뿐이었다). 그런 정태춘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 선생님은 내게 이런 귓속말을 했다.

“이 노래, 너 준다.”

 

천명관의 『고래』

작품 분석을 맡았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책이 없다. 여러 번,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또 무작위로 책장을 찾아봤지만 그 책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잠시 없는 채 놔두기로 했다. 그 순간 문득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 책은 내가 당신에게 빌려줬다. 그리고 줬다. 준 것 같다. 책에 라미 터키옥색 잉크와 펠리컨 브라운 잉크로 메모한 것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당신의 얼굴보다 더 선명하다. 그딴 것, 당신보다 중요한 것도 아닌데…… 서글퍼졌다. 다시 사야 할까, 도서관에서 빌릴까. 핑계 삼아 연락해 봐도 괜찮을까.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알라딘에서 결재까지 마쳤다. 당일 배송된단다. 고민도, 당신도,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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