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어머니와 아버지께선 어죽 잡수러 가셨다. 나는 정오의 푸른 햇볕이 떨어지는 차도를 바라보며 내 내면 어디쯤을 산책하고 있다. 환상적인 거품을 커피에 얹어주는 카페나 고급 레스토랑 따위의 풍요로운 가게는 없다. 입점 불가다, 이물질이다, 개점 한들 곧 폐점이다. 실제 집 부근은 내면에서 내몰린 업종뿐이다. 차도 너머에 우뚝 치솟은 교회는 몇 시간째 들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토요일 정오의 교회란 원래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죄는 평일에 짓는 것이니까. 교회 옆엔 안마방 <비서실>이 있다. 아름드리 네온등 한 쌍이 점점 빠르게 돌아간다. 여기서 불어오는 S라인 바람은 사람들을 벌거벗기고 순백의 도마 위에 올릴 것이다. 이 무방비를 생각하면 괜히 부끄러워져서 구석으로 달려가 타조처럼 엉덩이를 바짝 들어 숨고 싶다. 어제도 집에 들른 친구의 말에 따르면 11만 원에 ‘여비서’를 잠시 고용할 수 있다고 한다. 친구도 어딘가에서 전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집 앞에서 누군가 부도덕한 일을 벌인다는 걸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친구는 주머니를 털어 저런 곳에 출입하는 남자들을 비웃었다. 그의 애인은 일곱 살 연하다.

사과를 깎아 먹어 끈끈한 손으로 어느 여성작가가 쓴 책의 단단한 표지를 쓰다듬다가 믹스커피 한 잔을 타 마시고 전기장판 위에 벌렁 누웠다. 손가락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S씨는 지금도 집에서 사과잼을 만들고 있을까. 나는 도시의 개미 떼가 S의 사과잼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열된 범랑 냄비 안에서 잼의 점성(粘性)이 점성(漸盛) 하면, 당분의 투명한 결정이 오소소 일어나 한 무리의 붉은 혀를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모여든 개미들은 결정을 입안에 하나씩 물고 제 요량껏 집으로 옮겨갈 것이다. 곳간은 채우고 보금자리로 돌아온 개미들은 내키는 대로 늘린 방으로 들어가 한낮의 달콤한 모험을 생각하면서 아주 긴 잠에 들지 모른다. 자그마한 그들에게 하루는 더없이 길 것이다. 게다가 슬픔도 작고 기쁨도 매우 작을 테니 그리 밑지는 삶은 아니지 않을까. 그에 비하면 우리는.

슬픔도 작고 기쁨도 작은 조카들이 학원을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 반겨줄 사람은 나뿐이지만 나는 아이들을 반기지 않는다. 내 인상 속에서 아이들이란 누구보다도 비겁하고 악하며 타산적이다. 조카들은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관심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도라에몽>을 본다. 어라, 어쩌면 기쁨은 작을지 모르겠지만 외로움은 생각보다 클 수도 있다. 조카들뿐 아니라, 어쩌면 개미들도 기쁨은 당 결정 크기만 할지라도 슬픔은 몸무게의 2백 배 이상일 것도 같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아직까지 생존해있다는 결과가 그 슬픔이나 외로움의 무게를 우리가 감당해 짊어질 수 있단 증거는 아니다. 내게 주어진 과도한 시련의 대가로 비서실 평생 자유이용권을 내어준다 해도 인간성을 허물어뜨리는 슬픔만은 안 된다. 나를 나로 느끼지 못할 때까지 왜 나는 당신을 비난해야 했을까. 어느 날 내가 몸무게의 2백 배의 슬픔을 짊어질 수 있을 때, 그때쯤 당신과 당신이 저지른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다. 수많은 비난은 목적지를 잃고 밤하늘을 떠돌다가 에리다누스자리(Eridanus)의 강물이 되어 지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슬픔은 끼니마다 밥 한 공기를 가뿐히 비우며 건강히 살아가고 있다.

“삼촌, 우리 배고파요.”

그래. 너희들의 슬픔도 밥은 먹어야지. 나는 고깃국을 끓여 슬픔들에게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저녁밥을 안치고 보리차를 끓이고 다시 전기장판에 누워서 문자메시지함을 정리한다. 이 모든 메시지를 다 삭제할 수 있을 때, 나는 얼마나 이우시들어 있을까. 당신의 건재함에 깜짝 놀란 사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어죽을 드시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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