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분다. 중력 탓에 바닥으로 꺼져가는 이들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려주는, 마음이 따뜻한 소녀의 입김 같기도 한 봄바람이 분다. 더없이 유순한 이 바람은 노랗게 익은 햇살 아래에서 호기심을 키우고 잿빛 도시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변덕스럽게 사방으로 달려간다. 특유의 가벼움으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격변의 충동을 마음껏 휘두르며 달려간다. 소멸의 두려움과 같은 노쇠한 감정이 바람을 멈춰 세우거나 가두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지닌 비정형적 덕목은 바람의 왕국에 내린 축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출생이 그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과학자의 이성을 통해 바람을 공기의 흐름으로 단순히 치부하는 것은 스스로 감성의 건조함만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얄팍한 생각을 말해보자면, 바람이 지닌 덕목의 기원은 비극적 운동성에서 시작된다. 적요(寂寥)를 즐기는 순간 소멸해야 하는 바람의 비극성. 이 때문에 바람은 늘 최선의 힘으로 생명과 비생물에 부딪힌다. 그로 인해 약해지고 주춤할지라도. 더 큰 힘을 향한 세속적인 욕망은 애초에 사람의 것이지 자연에게는 아니다. 오로지 선(善)을 지향할 뿐이다.
나는 바람을 지켜본다, 광대한 하늘을 엄청난 존재감으로 채우고 있는 태양도 한 눈에 담아 지켜본다. 구경꾼을 앞에 두고 바람은 자연을 죄책감 없이 사치해 온 고목(枯木)에게 그 어떤 정신보다 앞서는 결단으로 달려들고 있다. 하지만 바람은 찢겨나갈 뿐이다. 외상없이 몇 개의 류(流)로 갈라지고 기세가 한풀 꺾인다. 이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 내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고장에서부터,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긴 시간을 가로질러,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싸움이 지속되는 것. 나는 이 되풀이를 영원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다. 시공간을 초월한 바람의 발길질을 목격할 수는 없지만, 공기에 싣고 온 온갖 향기는 긴 투쟁을 증언한다. 내 곁을 지나쳐 녹슨 시계탑을 향해 돌진한 한 무리의 바람은 개나리 봉우리를 짓궂게 툭툭 건드리고 언덕을 넘어왔을 것이다. 기진한 상태로 피 대신 흘리는 향. ― 고목은 봄바람과의 대결에서 한 번의 부전승을 거뒀다. 영원한 반복에서 한 번의 부전승은 내세울 게 못 된다. 하지만 외압으로 인해 눕지 않는 것이 직립(直立) 하는 존재의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다면, 한 번의 투쟁과 승리의 연속이야말로 영원한 직립의 필수조건이다. 그런 이유로 우린 높이 선 것들의 고고함을 사랑한다. 동일한 이유로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아니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소명에 따라 고목을 베야 한다. 질투는 아니다. 이 고목은 수천 중 하나인 고원의 주인이자 질서다. 하지만 영원을 위한 투쟁이 생명의 목적이 되어버린 부덕(不德)은 죽이고 죽여야 한다. 진작 스스로 죽지 못한 죄. 고목이 온 땅의 양분을 게걸스레 먹어 치우는 동안 고원의 초록 싹들은 갈증으로 고사하고 있다. 이 학살을 막아야 한다.
고목의 단단히 굳어버린 추억은 슬퍼하자. 나는 예의를 갖춰, 평생 쇠를 다룬 대장장이가 소홀함 없이 이를 세운 톱으로 고목의 몸통을 켠다. 고목은 돌의 소리를 낸다. 쇠가 내리는 고난의 정체를 조금씩 이해한다. 고원은 누군가 풀무질을 해대는 것처럼 점점 뜨거워진다. 난 땀을 닦아내고 벌거벗는다. 이성은 나약해서 몸을 조금만 괴롭혀도 쉽게 녹아 붙는다. 나는 노래를 불러 보기로 한다. 이대로 이곳이 사막이 된다면, 초록이 죽은 자리에서 내가 뿌린 노래의 씨앗이 바람과 함께 시(詩)로 태어날까. 시작은 미약할 시를 위해서 이를 깨문다. 어금니를 시작으로 온몸이 모래로 주저앉으면 나도 비감(悲感)이 깃든 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구(求)함에 구(絿)해선 안 된다. 대지 위에서는 낯 뜨거운 요행과 구름의 가벼움과 봄비의 부드러움을 기대해선 안 된다. 내가 아니더라도 사막에는 유령이 너무나 많다. 땀이 흐르고 몸이 반짝거린다. 약하고 아름답다. 눕고 싶다. 누워서 뭐라도 안고 싶다. 하지만 내 몸의 욕망은 이성과 합의한 것일까.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꼭 한번 같이 자고 싶던 여자, A. 나는 망상의 A를 침대에 눕혀놓고 ‘발기한 성기/시들한 욕구’와 ‘시들한 성기/발기한 욕구’ 사이를 매일 밤 오갔다. 망상에서도 모든 게 완벽한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유령이나 고목이 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몸은 서고 싶은 것일까, 눕고 싶은 것일까. 나는 빨개진다.
휴식. 나는 고원에서 도시를 상상한다. 상상 내부에는 한 번쯤 보았음 직한 사람과 사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이를 ‘추억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상/추억 속에서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주인을 총총 앞질러 간다. 따뜻한 봄날이다. 아직 고귀한 초록색을 구하지 못한 금빛 잔디는 강한 윗바람의 여운에 맞춰 흔들리고 있다. 도시의 사람들은 빽빽한 건물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걷는다. 왜 몸을 살짝 비틀어 저 태양의 영향력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빙하기 고생물의 좌절을 체험하거나 인류 탄생의 전기를 기념 중인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왜. 내가 오히려 황홀한 태양 밑에서 톱으로 고목을 베면서 원시(原始)를 추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조금 문명화된 원시라고 해서 원시와 다르다, 원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현재를 추억하는 것은 빛의 속도를 초월하고 우리가 다수로 분리되어 마주 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지 말자.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망각에 거역하고 추억에 거역하는”(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책세상, 2003, 179쪽) 삶은 언제나 가능하다.
나는 드디어 누운 고목을 천천히 살핀다. 태양의 열기를 입에 물고 날개를 편 바람은 고목의 잔해를 고원 언덕에 골고루 흩뿌리고 있다. 뿌연 대기 사이로 보랏빛 저녁이 오려고 한다. 나를 조금 채근해 보지만 곧 이어질 밤이 두렵진 않다. 사람들의 눈을 가릴 준비를 하는 저녁은, 일종의 중재다. 태양이 광채와 어둠을 두 손에 나누어 쥐고 다른 고원의 정오를 위해서 엄격한 보폭을 유지한 채 옮겨가는 모습. 이 경이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그래도 두려움이 몸 어딘가에서 만져진다면, 그것을 부추긴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 그는 두려움의 뒤편에 숨어있다. 나는 광채를 잃어가는 빛의 색조에 거리낌 없이 물든다. 나는 주머니칼을 꺼낸다. 칼의 손잡이엔 태양의 문장이 매끈하게 양각되어 있다. 이 칼의 날카로움은 언제나 의지에 따라 벤다. 의지와 믿음이 있다면 초월의 준비를 끝낸 셈이다. 스스로를 베는 일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인류가 자랑하는 도구들의 발전은 우리의 조급증과 불신의 수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는 의지와 믿음, 그리고 태양의 주머니칼로 우선 손톱만 한 목신(木神)을 깎을 것이다. 그로서 고목은 살지도 죽지도 못할 것이다. 신화나 역사가 되어, 그리고 이야기가 되어 회고될 것이다. 스스로 변명하지 않는 시로 고정될 것이다. 마른 껍질을 뜯어낸다. 나는 고목에 대한 오랜 오해가 덜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가 알몸이 된다면 많은 오해와 불신은 사라지지 않을까. 주머니칼은 나이테도 하나씩 줄여나간다. 고목은 점점 과거로 회귀하고 바람의 왕국에 가까워진다. 다시 돌아올 땐 예언이나 미래를 가득 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미완(未完)의 목신만을 남긴 채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누군가가 이 주인 없는 고원으로 고집스럽게 걸어 들어와 사막 어느 왕가의 미라보다 지독하게 시간을 견디면서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목신을 만들어낼 거라 믿는다. 이것은 절대 예언되지 않는다. 목신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지만 사람은 모두 각각의 목신을 깎는다. 당연한 예언은 불필요하다. 태양은 나무를 기를 것이고, 우리는 각자의 의지대로 목신을 깎을 것이며, 훗날 우리는 다시 고목이 된다. 태양을 쫓아 고결한 목적을 잊지 말고 나아가자. 나머지는 대지와 미래의 몫이다.
이 자정에, 나는, 하던 일을 마저 해야겠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거역하지 말 것. 혹시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꼭 해둘 말이 있다. 평소 나의 귀에 대고 내가 슬며시 속삭이던 말이다. 당긴 내 입술을 통해 늘 듣고 싶던 말이다.
―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내 것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