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나도 남자니까, 잠깐 가을을 걸치고 쓴다. (나도 잠깐 남자니까, 라고 읽어도 된다)

나는 여름 막바지에나 어울리는 얇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 가을의 신경질적인 바람이 종종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가 떠나버리기 일쑤이고, 서늘한 광장에는 나 혼자 남겨져 있다. 그 한복판에서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람은 과거로부터 온다. 미래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주었던 그 청량감 역시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의 기운’을 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미래의 기운’이라는 것이 다만 ‘기운’일지라도, ‘현재로서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언제부터인가 하루는 지루할 새도 없이 짧아졌고, 날이 저문 뒤엔 여지없이 몸이 눅눅하다. 나는 이제 안다. 왜 모든 노인의 눈에 깊은 우물이 파이는지를, 왜 종일 짙은 안개가 일어 앞이 흐려지는지를. 하지만, 이런 앎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노인은 말을 삼키고 돌아앉는다. 그냥 어디론가 그냥 걸어간다. 하지만 나는 노인이 아니다. 아직은.

나는 과거를 참고 견디면서 미래를 지어낸다. 그 ‘미래 이야기’에서 나는 고정되어 있다. 현재의 압정에 박힌 나는 ‘미래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이성’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성,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멋진 마음도 당신에게는 초라하다. 내 마음의 투박함이 당신의 화려함 곁에 섰을 때,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다. 우리에게 모멸을 회피할 권한을 달라. 스스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나의 경추에 폭발물을 설치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버릴 것이다. 아, 당신의 눈앞에서 얼마나 많은 머리통이 화려하게 터져버릴지! 목 부근이 근질근질할수록 나는 더욱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나와 나의 시선에 관해서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과거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현재의 사람에게 미래의 이성은 곧 죽음을 향한 셈만 빠르게 할 뿐이다. 암흑의 시간을 걷는 사람에게 미래는 죽음과 다름 아니다. 그보다 만약 당신에게서 본 무결함이라는 것이 결국 착각이었다면 나는 어떡하지. 이로 인해 나는 수많은 상처를 입어왔다. 이는 결함과 무결함에 대한 나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인간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내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당신의 무결함이, 당신의 벨벳 질감이나 시트러스 향이 미묘하게 균형을 잃는 것은 항상 슬퍼 마땅한 일이다.

광장에는 또 감이 익어간다. 나는 몸을 아청빛에 물들이며 생각한다. 가을이 겨울에게 다가설 때, 나는 어느 구석에서 누구보다 심각한 포즈로 웅크린 채 얼어버릴 것이다. 나도 눈에 깊고 검은 우물을 갖게 된다면, 그곳부터 투명하게 얼어버리겠지. 과거로부터 고이는 물은 미래로부터 솟아오르는 물보다 어는 점이 훨씬 더 낮으니까. 그리고 즐거운 광장은 미래의 인류에게 돌려주고 나는 서늘한 구석에서 여전히 당신을 지켜보겠다, 고 다짐한다. 심술로 그것을 빼앗지 말자. 그렇게 나는 해롭지 않은 사람으로 남겠다. 당신에게나, 당신의 미래에게나.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행복의 원칙

노량진역 계단에서 본 글귀를 의왕역까지 끌고 왔다. 한 여자를 이곳 의왕역에 버려두고 혼자 전철을 탄 적이 있다. 난…

가짜 선생은 거짓말이 어울려요

나 같은 가짜 선생은 스승의 날이 불편하다. 그래서 새 학기가 시작되면 스승의 날이 수업과 겹치는지부터 확인한다. 올해는 일요일에…

연극 〈김세진 교향곡〉과 〈굴레〉

백석예술대학교에서 연극 〈김세진 교향곡〉과 〈굴레〉를 관람했다. 대극장에 도착했을 땐 공연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현장은 분주했다. 스태프에게 방해가…

모두 봄꽃의 수취인 같다

자꾸 굳어버리는 몸을 주무르며 교정을 헤맸다. 사람들은 모두 봄꽃의 수취인처럼 나무 아래를 서성었다. 나는 꽃잎이 죽을 자리를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