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나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게 찌개에 몇 사발의 물을 부었을까. 가스레인지 곁에 서서 자꾸 졸아드는 국물을 지켜보며 속으로 내가 걷고 있을 읍내 곳곳을 그렸을 것이다. 찻길 조심해라. 그리고 차는 더욱 조심해라. 한 블록 밖까지 미리 나와 서성이던 게 찌개 냄새 속에서 나는 그런 보살핌의 기운을 맡았다. 그래서 꽃게탕보다 게 찌개가 좋다. 누군가 둘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머니의 풀리지 않는 파마머리와 그 수수함에 관해 한참 떠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소읍에 대한 감상적인 소회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소읍의 찬연함보다 이국 공항의 미끈함에 익숙한 사람이 점점 는다. 물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앙코르와트를 여행하기 위해서 팔도 명산의 사찰을 빠짐없이 둘러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공간의 혼잣말’이다. 듣거나 말거나, 모든 공간은 (우리가 엄마를 속되게 걸고 주장하는 것 이상의) 완고한 어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럼 우리는 각자 다양한 종류의 리시버가 되어 공간과 주파수를 맞춘다. 우리가 다른 한 공간으로 몸을 옮긴다는 것은 그 공간에 어울리는 정물이 되고자하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한동안 돌멩이나 나무나 이정표가 되는 데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제 저곳에 있던 우리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공간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 변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와 공간 사이의 일치가 있다면 당연히 불일치도 있고 치열한 분쟁도 일어난다. 나는 이질적인 자극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반디앤루니스보다는 제일서점에, 크라제버거보다는 롯데리아에, 휘황찬란한 백화점보다는 재래시장에 놓이는 게 편안하다. 우연히 살림을 푼 재개발 예정지역에서 여러 해 주저앉아 버렸듯이. 지금의 내가 게 찌개와 고봉밥이 오른 밥상 앞에 앉아 있듯이.

나는 숟가락에 밥알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주의하며 떠먹었다. 서툰 수저질을 보여 밥을 자주 챙겨 먹지 않는단 사실을 들키면 큰일이다. 묵묵히 식사 실력을 평가하던 어머니는 얼마 전에 다녀온 돌잔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 아빠는 내 동창이지만 이름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너는 언제 낳아서 애 학교 보낼래? 그냥 혼자 늙어 죽을 거냐?”

“폐 끼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그게 뭐가 나빠요.”

나는 내가 사는 것에 관해 생각할 때, 어머니는 내가 죽는 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모씨 대는 누가 잇냐?”

“그것 좀 끊어지면 어때요.”

“얼라? 돼지는 한 번에 젖을 열네 개씩 물리는디 너는 고거 두 개도 다 못 물리냐?”

“내가 깨물 것도 없네요.”

어머니는 전통적인 종족보존의 의무에 대해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나의 DNA가 세계에 남겨지지 않는다면,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 있는 결과라고.

“그럼 너랑 니 형 죽으면 제사밥도 다 얻어먹었네? 밥 많이 먹고 오래오래 살아라.”

네. 알겠어요. 나는 오래 살고 싶다. 나는 지루하도록 오래오래 살면서 모든 아름다움의 적멸(寂滅)을 목격하고 싶다.

어쩌면 건넌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조카들이 결혼을 할 때쯤 나는 작은 일에도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역시 무섭다. 너무나 무서워서 뭐라도 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곁에 놓여있던 삼립 <누네띠네>를 집었다. <누네띠네>의 1백44겹 조직이 입안에서 부서진다. 나는 자취방에서 먹던 1백 개들이 <누네띠네> 생각했다. 반갑다. 너무 반가워서 참말로 고향에 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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