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이 동네에서 오 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근면 철물’ 주인을 보지 못했다. 하기야 고작 동네 주민이 철물점 주인과 얼굴을 익히고 계절 인사를 나눌 일이 무어 있겠느냐마는. 철물점에 매일 들러 나사못이나 서까래를 사들이는 취미나 직업이 있다는 소리를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럼에도 매일 지나다시피 하는 시장의 목 좋은 곳에서 만물을 파는 이의 얼굴을 본 적 없다는 것이 내가 아직 타지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흑석시장 곁에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면서 골목이 더 좁아 들었으니 어쩌면 철물점 길목에서 그를 내가 몇 번쯤 막아서고 꾸벅 사과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들, 근면 철물의 주인이 자신의 가게만큼이나 늙었다면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무관심한 탓도 있겠지만 어째 노인의 생김은 수년 동안 이곳저곳에서 뽑아 모아둔 한 줌의 나사못처럼 다 비슷비슷하다. 시내버스 안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엄마를 만났던가. 그깟 불편들, 그중에서도 자리를 내어주며 여기 앉으시라 말 붙이는 불편을 피하고 싶어 얼마나 많은 바늘 좌석에 앉았던가. 터무니없는 짐작이지만, 자디잘은 노인들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편적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취하게 된 건 아닐까.

아니다. 내가 근면 철물의 주인을 본 적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내가 아는 ‘근면’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면한 사랑을 구석에 방치하고 쌀쌀한 사람의 발끈하는 애정을 구걸하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근면의 실추된 위상이다.

얼마 뒤, 나는 한마음 슈퍼마켓에 가다가 근면 철물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족히 일흔 살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체크 목도리를 목에 묶고 가게 앞에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랫목에 앉아 굵직한 추억만 골라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듯 보였지만 그는 낡은 물건을 돌보는데 기운을 쏟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고심해 내건 간판에 평생 끌려다녔을 노인을 생각했다. 근면. 그리고 어느 늙은 남자를 한 명 떠올렸다.

내가 떠올린 남자는 근면 철물만큼이나 낡아빠진 양복점의 주인이다. 맞춤양복을 걸치는 사람들은 오래전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지만, ‘황금 양복점’이라는 간판은 소읍 외곽에 여전히 걸려 있다. 양팔 너비의 비좁은 골목 안으로 몇 발짝 걸어 들어가면 왼편으로 검둥개 한 마리가 묶여 있고 그 맞은편엔 황금 양복점의 작은 출입문이 있다. 그 안에서는 나이 든 사내 여럿이 모여 쉬지 않고 꽃패를 집어던진다. 점수대로 바둑돌이 한 주먹씩 오가다 보면 해가 떨어질 즈음에야 간신히 승부가 난다. 나는 낡고 시간 많은 주인과 사내들에게서 양복점이라는 업종과 비슷한 운명을 감지한다. 동네의 양복점과 양장점은 대부분 세탁소로 업종을 변경했다. 꼽추 아저씨의 전파사도 수년 전에 간판을 내리고 세탁소를 열었다. 동네에 유일하게 일제 카세트를 고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두 사라져버렸다. 황금 양복점도 십수 년 후면 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가끔 오늘의 삶보다 내일의 죽음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느새 내 몸에도 불편한 곳이 많이 늘었다. 그날이 오면, 나는 무엇을 끌어안고 죽어갈까.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기억의 역량 평가

최근 나는 또 쓸데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어둡고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동시에 활동적인 기억(혹은 과거)’을 갖게…

파편, 2018년 05월

20180509 (수)  새가 재잘댈 때까지 또 잠들지 못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자꾸 시간을 거슬러 넘어왔다. 대체로 무례함과…

반지하의 정서(情緖)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앞까지 볕이 기어 왔다가 달아난다. 나는 놀리기 쉬운 술래다. 몸의 절반을 반지하에 묻고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