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눈 뜨자마자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KBS <아침뉴스타임>의 유지원 아나운서는 전국적인 한파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단지 햇볕이 태만했던 것 같다. 그 시각 따뜻한 햇볕은 서래마을의 노천카페 앞에서 뒹굴었을 거다. 그 덕에 우리 집 욕실 수도는 얼었다. 나는 끓은 물을 대야에 붓고 차가운 물을 조금씩 받으며 검지를 담가 물 온도를 맞췄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주전자에 남은 물이 적어서 샤워는 포기했다. 그냥 머리만 감자. 머리를 감고 만지는 일이 갈수록 지긋지긋하다. 생각 같아서는 주방가위를 집어와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새로 산 5중 날 면도기로 두개골의 굴곡을 따라 남은 걸 전부 밀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머리카락마저 없다면 누구의 호감도 얻지 못할 것이다. 호감은커녕 미움을 살 것이다. 머리카락을 문질러 샴푸거품을 내는 도중, 언젠가부터 내가 괜한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해까지는 모든 것에 화를 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에 신경질을 부렸고 영하 십 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와 얼어버리는 수도관과 매달 날아오는 도시가스요금에도 화를 냈다. 요금징수원이 멸종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망률이 높은 직업군 중 일등은 요금징수원이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명쯤은 내가 죽였을 것이다. 내게 죽임을 당한 요금징수원이 비록 자신의 집에 찾아온 다른 요금징수원에게 내몰려 이런 직업을 구했을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요금징수원이 아니고, 내 머리 위로 엄청난 수의 요금징수원이 줄줄이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무죄다. 내 돈을 받아 첫 번째 요금징수원이 전기세를 내면 그것을 받은 두 번째 요금징수원이 세 번째 요금징수원에게 도시가스요금을 지불하고, 세 번째 요금징수원은 그 돈을 받아 네 번째 요금징수원에게 의료보험료를 낼 것이다. 제기랄, 세금.

나는 머리를 감고 남은 물 몇 리터로 샤워를 시도했다. 평소라면 삼백 리터는 족히 썼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음부터 물을 아낄 생각은 없다. 나는 방이 두 칸이라는 이유로 이웃보다 수도세를 배로 낸다. 이웃집은 남녀가 동거를 한다. 잘 씻지도 않는 남자가 방이 두 칸이라는 이유로 두 배의 수도세를 내야 한다니. 그런데도 나는 물을 헤프게 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문틈과 창틈을 꽉꽉 틀어막고 물을 집 안에 가득 채워 천천히 유영한들 뭐 하겠나. 어차피 헤엄도 못 치지만.

집을 나오다가 동네 골목 벽면에서 볼품없는 광고지를 발견했다. “수도녹임.” 나는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의 수도 녹이는 방법을 상상했다. 흰 종이와 검정 매직으로 전단지를 손수 만든 사람이라면 매우 근대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수도를 녹일 게 뻔하다. 내가 까무룩 잠든 사이, 바가지에 따뜻한 물을 받아 쉴 새 없이 수도꼭지에 끼얹는다거나 드라이어로 파이프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댄다거나…. 조금 더 신경 쓴 방도라 봐야, 가스 토치램프로 수도꼭지와 파이프를 지져대는 정도일 것이다. 하긴 그 방법이 무엇이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어쨌거나 녹이기만 하면 된다고? 아니. 수도가 얼어붙으면 집에서 꼼짝 안 하면 된다. 나를 죽이는 것은 한파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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