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09시23분 순천 루이비통 무인텔(지도)

모텔에서 눈을 뜨니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창 밖을 내다봤다. 마주해 있는 건물 창은 수억 개의 눈이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운을 단단히 여미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마에 아빠는 뒤척임도 없었다. 씻고 나서 어제 쓴 수건을 다시 사용했다. 화장대 위에 새 수건이 놓여있었지만 아껴야 할 것 같았다. 이 찌질한 절약정신을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11시30분 순천 원조 동경낙지(지도)

남부시장 사거리(지도)에서 까불이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남쪽에는 여름이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들고 사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손 흔들던 까불이는 무단횡단을 했다. 까불이의 안내를 받아 순천에서 유명하다는 낙지전골+비빔밥에 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서 앞서 온 손님은 둘 뿐이었다. 가장 먼저 전이 나왔는데 조금 심심했다. 이어 물김치, 메추리알, 콩나물무침, 김치 등 밑반찬이 나왔다. 낙지전골이 나왔을 땐 자리 대부분이 손님으로 채워졌다.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자리 앞에 각각 놓았다. 국자가 보이지 않아서 내 수저로 전골을 저은 후에 냄비에 걸쳐뒀다. 마에 아빠는 거기에 올려두면 수저가 뜨거워진다고 말했는데, 나는 상관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잠시 후, 전골을 한 번 더 저었고 그 수저를 상에 내려 놓으려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에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입술 한 겹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낙지전골을 떠 밥에 얹어 비비다가 김 가루를 뿌려 넣은 뒤 다시 비벼 먹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 “맵다.” “맵지?” 하며 헥헥거렸다. 하지만 우린 “왜 맵지 않지?” “원래는 매워야 하는 건가?” 하며 먹었다. 밥을 다 먹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수저에 덴 입술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13시40분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지도)

버스로 한산한 길을 따라 30분쯤 들어가자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이 나왔다. 나는 입장권을 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덜거렸다. 우리는 벚꽃과 조형물을 찍으면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흰색 무지티와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와 검은 재킷과 검은 스커트를 입고 하얀 구두를 신은 연인은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는 곳마다 한발 앞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열차 한 대 보였다. (아마도) 갈대밭 사이를 오가는 열차였는데 익사이팅하게 보이진 않았다. 대신 우리는 생태체험선을 타기로 했다. 그때 아까부터 우리를 방해하던 커플 중 남자가 보였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아! 이런 장소에서 동네 후배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합류했는데, 마에 아빠가 “어쩐지 촌스러웠어.”라고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생태체험선은 정원이 다 찬 상태였다. 매표소 직원분은 다음 배표를 미리 끊어두겠냐고 물었는데 이따 다시 와서 끊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옛 배를 재현해 놓은 곳에서 사진을 찍다가 파라솔 아래에서 잠시 쉬면서 까불이의 어머니께서 싸주신 유부초밥을 먹었다. 사물함에 짐을 넣고 다시 배로 갔다. 그런데 단체로 온 사람들 탓에 또 탈 수 없었다. 우린 저 볼품 없는 배를 타지 않기로 했지만 까불이는 내내 아쉬워했다. 나도 아쉬웠다. 허름한 배라도 물 위로 미끄러진다는 것은 변함없이 멋진 일일 것이다. 우리는 다리를 따라 걸으면서 갈대밭과 작은 게를 구경했다. 갈대들이 긴 몸을 세우고 무리지어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환경의 변화에 초연해 있었다. 초연이란 감정이 없는 것이다. 가까이에 전망대가 있다는 표지를 따라 걸었지만 전망대는 나오지 않았다. 전망대는 산 위에 있었다. 더 움직일 수 없다는 까불이와 나는 아래에서 기다렸고 마에아빠는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30분쯤 지나 전망대에서 내려온 마에 아빠는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봄은 봄, 여름은 여름, 가을은 가을, 겨울은 겨울대로 모두 볼 만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갈증이 나서 자판기에서 코코팜을 뽑아 마셨다.


18시12분 순천 계림유사(지도)

이곳도 까불이가 안내했다. 계림유사는 순천지역의 치킨 체인점이라는데 그리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닭도 작았다. 나초를 함께 주는 건 좋았지만 몇 개 집어먹었더니 당기지 않았다. 남은 나초는 마에 아빠가 모조리 먹어치웠다.


19시32분 순천역 → 23시45분 수원역 → 24시20분 용산역

순천역 플랫폼에서 까불이와 작별을 했다. 아쉬워하던 까불이는 열차가 출발한 뒤로 연락이 없었다. 나는 마에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순식간에 마에 아빠가 내릴 수원역에 도착했다. 그는 내게 함께 수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나는 수원에는 내 노트북이 없으니 안 된다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나는 수원행 열차표를 들고 용산역에서 내렸다. 연장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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