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06시40분 흑석동 동작구을 투표

제19대 국회의원선거일. 나는 투덜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올라 투표소를 찾았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 바뀐 투표소다. 이 투표소 부근에서 한 어르신이 안내하는 젊은이에게 화를 내고 계셨다. “아니, 이딴 곳에 투표소를 설치해 놓으면 무릎 아픈 노인네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거야! 다 정신이 빠졌어.” 나는 동작구을의 2번 후보 이계안(민주통합당)을 뽑았다. 이계안은 최종 득표율 44.0%로 최종 득표율 50.8%인 새누리당 정몽준에게 패했다. 나는 정몽준의 당선확정 보도를 보면서 동작구을의 주민을 비웃었을 뿐 흑석동에 사는 사람들을 연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이다. 정몽준의 공약대로 흑석동이 제2의 강남이 될리 없겠지만 모두가 행복하길 바란다. 비례대표 정당투표에는 진보신당을 뽑았다. 이날 진보신당은 비례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진보신당의 정당득표는 고작 1.1%였다. 기독자유민주당보다 0.1% 낮은 득표율이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부산 사상의 득표 결과다. 박근혜와 카 퍼레이드 한 번 했다고 손수조가 43.8%의 표를 얻을 수 있다니. 다 정신이 빠졌다. 나는 대한민국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진보인사는 벌써 다른 희망을 이야기했다.


07시35분 용산역 → 08시02분 수원역

느긋하게 무궁화호를 기다리지 못하고 새마을호 표를 끊었다. 내게 넉넉한 건 시간뿐이었고 고작 십여 분 차이였는데 조급증 탓에 허튼 돈을 쓴 것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수원역에 도착하니 마에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롯데리아에 들러 한우불고기 버거 세트와 유러피언프리코치즈 버거 세트를 먹었다. 햄버거는 떠나는 날과 썩 잘 어울리는 음식처럼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기대로부터 기인하는 것 같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면 우린 좀 더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여행지의 향토색이 가득 담겨있는 미래의 음식을 즐기기 위해선 허기를 남겨둬야 한다. 미래의 음식이라는 것이 출발하기 직전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흔한 환각일 지라도.


09시12분 수원역 → 12시15분 동대구역

열차는 예정보다 동대구역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진해행 열차가 들어올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플랫폼에는 연인들로 가득했다. 흐린 날씨에도 여자들은 봄꽃보다 돋보이기 위한 치장을 정성껏 한 모양새였다. 나는 대구 사투리를 들으면서 몇 시간에 걸쳐 건너온 공간을 실감했다. 그리고 여자들의 애교 섞인 말투에 (그녀들에겐 화난 말투였을지라도) 풋 하고 웃음이 났다. 나는 2002년을 마지막으로 대구사람을 본 적이 없다.


12시30분 동대구역 → 14시14분 진해역

창원시 진해구 초입부터 벚꽃이 잔뜩 보였다. 빗방울이 열차 창에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꽃잎은 끝없이 떨어졌다. 연인이 대부분이었던 승객들은 빗방울에 탄식했고 꽃비에 탄복했다. 경화역이 가까워지면서 열차는 속도를 줄였다. 창밖의 사람들은 철로 주변으로 몰려들어 손을 흔들었고 열차 안의 사람 가운데 몇몇도 손을 흔들었다. 나는 거절당할까 겁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해역은 아담했다. 사람들은 수령이 좀 되어 보이는 벚나무와 진해역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곳 진해에서 얼마나 많은 벚꽃잎을 보게 될지도 모른 채.


14시34분 진해 제황산 공원(지도)

나는 마에 아빠를 쫓아 제황산 공원으로 갔다.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아서 몇 번이나 지금 가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제왕산? 제황산! 공원 입구에는 모노레일을 타려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우리는 상의할 것도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찼다. 더웠다. 비가 왔다. 그래도 올라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원 정상에는 마치 배달의 달인이 머리에 이고 다니다가 힘들어서 팽개쳐 둔 쟁반-빈그릇-쟁반-빈그릇-쟁반-빈그릇처럼 생긴 진해탑이 있었다. 무려 8층. 엘리베이터 앞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에 운동을 시작한 마에 아빠는 계단을 택했고 최근에도 아무 것도 안 하는 나는 엘리베이터를 택해 올라갔다. 그리 시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진해구가 한 눈에 보였다. 먼 바닷가에는 정박 중인 군함이 보였는데, 마에 아빠는 군함과 해군 훈련소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별스러운 질문을 했다. 마에 아빠는 새로 산 카메라 소니 NEX-7의 셔터를 신 내린 듯 눌렀다. 나는 마에 아빠가 어렵다고 말한, 소니 NEX-7의 파노라마 기능의 촬영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비웃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하늘이 맑게 개였다. 하지만 사진 속의 벚꽃은 여전히 희미했다.


16시13분 진해 정식콩나물해장국(지도)

공원에서 내려오자마자 못난이 핫도그를 사 먹었다. 무려 이천 원짜리 핫도그였지만 밀가루 반죽이 엉망이었다. 마에 아빠는 이제 여좌천으로 향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여좌천과 포청천 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아는 바가 없었다. 여좌천으로 향하다가 한 식당에 들어갔다. 마에 아빠는 이 식당을 어느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니, 밥이 담긴 이런 사발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말 맛집인지 알 수 없었지만 된장찌개와 돼지고기 주물럭 모두 조금 달지만 먹을만했다. 물론, 미래의 음식은 아니었다.


16시40분 진해 여좌천(지도)

여좌천의 벚꽃은 장관이었다. 여좌천은 로망스(드라마) 다리로 유명한 모양이던데, 당시에 이 드라마를 봤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긴 2002년에 종영된 드라마를 기억하고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에 아빠는 일부러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계속 찍었다. 벚꽃은 떨어지는 순간에도 심각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벚꽃을 귀에 꼽은 채 포즈를 잡았고 남자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절대적으로 예쁜 여자친구를 모셔온 남자들의 카메라는 대부분 DSLR이었다. DSLR을 매고도 혼자인 남자들은 200미리 렌즈를 마운트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주로 여좌천을 따라 늘어서 있는 주택을 보면서 꽃길을 걸었다. 이곳 주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베란다나 창가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꽃을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17시36분 진해 경화역(지도)

콧수염은 경화역에서 벚꽃빵을 꼭 먹어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는 동안 벚꽃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콧수염에게 전화를 걸어서 벚꽃빵이 실재하는 것인지 따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군항제 기간에는 벚꽃빵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군항제는 어제 끝났다. 벚꽃이라도 주워 먹을까 생각하던 찰나,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들렸다. 진해행 열차였다. 사람들은 열차를 피하기는 커녕 철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몇 시간 전 열차 안에서 봤던 열차 밖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열차 바깥에 있다는 게 영 기묘했다. 마에 아빠는 열차가 들어오는 철로 가에서 자세를 잡았다가 경적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철로에서 멀어졌다. 나는 마에 아빠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고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나는 이번에도 손을 흔들지 못했다.


18시38분 경화역 → 19시14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택시를 잡아타고 마산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진해역이나 진해터미널에는 순천으로 가는 차편이 없었다. 택시 안에서도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갓 심은 벚나무가 보였다. 진해구는 예산 대부분을 벚나무를 심는 데 사용하는 것 같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택시비는 1만 1천 원이 나왔다.


20시00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 21시39분 순천터미널

긴 잠을 잤다. 언제 마산을 벗어났는지, 언제 순천에 들어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순천행 버스 안은 아직 조명이 꺼진 채였다. 마에 아빠는 차창에 붙어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서울과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재빨리 지나가는 풍경만으론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다.


21시47분 순천터미널

순천터미널에서 까불이를 기다렸다. 십 분쯤 기다리자 멀리서 “모군!”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 선 택시 안에서 까불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까불이는 “지갑을 잃어버렸어. 택시비가 없어!”라고 말했다. 썩 어울리는 재회였다. 나는 택시비로 5천 원을 건넸고 2천 2백 원을 돌려받았다. 까불이는 엄마와 독서실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지갑은 독서실에서 찾았다.


22시01분 순천 드림독서실(지도)

까불이는 지갑을 찾으러 다시 독서실에 들어갔다. 나는 독서실 앞에서 담배를 오랫동안 피웠다. 마에 아빠는 카메라로 벚꽃이 걸려있는 캄캄한 하늘을 서너 장쯤 찍고 지웠다.


22시11분 순천 OK목장(지도)

까불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다닌 곳이라며 OK목장에 데려갔다. 우리는 개표방송을 보면서 삼겹살 2인분과 통가브리살 2인분을 먹었다. 지역방송인 탓에 서울 소식은 드물었다. 까불이는 전국 투표율이 54.3%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큰 소리로 화를 냈고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했다. 또, 정동영의 득표율이 김종훈과 20.2%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많이 서운해 했다. 나는 OK목장의 사장님이나 점원이 투표를 안 했을까 봐 불안했다. OK목장의 삼겹살은 아주 맛이 좋았다.


23시28분 순천 스윗피 멀티방(지도)

난생 처음으로 멀티방이란 곳에 가봤다. 마에 아빠도 멀티방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까불이의 선두지휘로 복싱을 했다. 한 달쯤 복싱 도장에 다닌 마에 아빠는 계집애처럼 맥 빠진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마에 아빠에게 3KO로 승리했다. 까불이는 멋진 폼으로 멋진 승부를 보여줬는데, 이틀 뒤에 몸살이 나 앓아 누웠다. 볼링은 지루했고 노래방은 엉성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두 그릇이나 퍼먹었다.


01시31분 순천 루이비통 무인텔(지도)

나와 마에 아빠는 까불이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잘 곳을 찾아 헤맸다. 둘 다 간판이 화려한 곳은 제외했다. 처음 들어간 모텔은 방이 다 찼는지 관리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모텔이 루이비통 무인텔인데, 입구를 못 찾아서 건물 외곽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결국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서 대실을 했다. 실내장식도 매우 깔끔했는데, 욕실에 쉐이빙폼이 비치된 걸 보고 살짝 감동했다. 다음날, 퇴실하다가 이 방이 특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천장을 열어서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모텔이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모텔 이름으로 검색해 본 까불이의 말로는 침대 옆에 놓인 리모컨에 천장을 개폐하는 버튼이 있다고 했다. 고작 침대의 웨이브 기능에 감탄했던 우리는 뒤늦게 억울함에 몸서리쳤지만 돌아갈 수도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오! 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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