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나는 짱구 이씨와 단둘이 캐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쾌했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눴고 주변 사람들의 근황에 대해서 주고받았다. 당연히 요즘 만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들었을 것이다. 짱구 이는 항상 사랑하고 항상 애통해 하니까. 양주를 세 병쯤 주문했을 때 내 의식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이 술집 벽에 진열된 장식물 같았다. 반면 짱구 이씨는 꼿꼿한 장승이나 가파른 벼랑이나 전망대의 망원경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볼 만한 겨를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89만 원 짜리 카드영수증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막 깨어난 짱구 이씨는 기억 속의 테이블을 토대로 술값을 꼼꼼하게 계산해보더니 “딱 맞아!”라고 말했다.

…분명 현실은 아니다. 꿈이었을까 환각이었을까.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터무니없이 평범한 불감의 인간

당신은 어떤 공간의 A 지점에서부터 무한히 이동한다. 그 이동은 마찰 계수 0에 수렴하며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당신이…

파편, 2019년 07월

20190707 (일) 조카2호가 서울에 왔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캐리어를 끌고. 방학의 기쁨이 너무 짧다. 20190713 (토) 해수욕장의…

파편, 2018년 01월

20180101 (월)  K의 고양이 두부에게 림프종에 생겼다. 그에게 책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하는 걸까』(부크크, 2017)를 보내주고 싶었는데 절판이다.…

파편, 2017년 06월

20170602 (금) 농심 볶음 너구리야… 난 너 때문에 돈을 버렸고 살이 찔 거야. 지금이라도 토해내고 싶어. 그런데 찬장에…